
웡섷
페어드 홀리데이
by. i
겨울이 되면 평소보다 조금 더 옷을 껴입고 출근할 준비를 한다. 절기상 겨울이지만 낮이 되면 한국의 따뜻한 봄 기온이 되기 때문에 두꺼운 외투가 아닌 언제든 벗어던질 수 있는 셔츠나 집업을 주로 입는다. 얼굴과 목 대부분을 덮는 벙거지 밭일 모자에 멋내기 위해서가 아닌 눈 보호용 선글라스도 가끔 챙겨준다. 마초 감성을 추구하는 이십대 청년 우영도 반팔이나 반바지를 입는 날에는 팔토시, 레깅스 착용을 빼놓지 않는다. 맨살을 내놓고 하루 8시간 밭일을 하게 되면 귀국보다 피부암 발병이 먼저일 수 있음을 우영은 항상 명심한다. 햇빛이 매일 뜨겁게 내리쬐는 이곳은 호주 동해안에 근접해 있는 농사가 주 산업인 촌구석이다.
우영은 머리부터 손끝 발끝까지 블랙의 농사꾼 옷차림 위에 실종 방지용 형광색 작업조끼를 걸치고 도구들을 챙겨 숙소를 나섰다. 바로 앞에 우영의 일터인 광활한 포도나무밭이 펼쳐져 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땡볕 아래 열심히 포도를 따던 우영은 현재 과육이 다 떨어지고 앙상하게 남은 포도나무들을 다듬는 일을 하고 있다. 열매 따기보다는 비교적 더 활동적인 일이었으나 푸릇한 구석 하나 없이 버석한 나무들이 시야에 가득 찬 나날이 우영은 지루했다. 한국의 치열함이 싫어 호주행을 택했던 우영인데 고작 마트 하나 있는 고여버린 시골 마을에서 반복적인 일을 하다 보니 다시 경쟁사회가 그리워지는 것도 같았다.
우영의 하루 중 가장 큰 고민은 숙소에서 밭까지 걸어가는 짧은 출근길 동안 오늘은 사다리를 탈 일이 있을까 생각하며 제 키보다 살짝 낮은 철제 사다리를 챙길지 말지 주저하는 일이었다. 키가 작지 않은 나무들을 다듬어야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꽤 무게가 나가는 사다리를 굳이 챙겨 왔지만 과거의 우영이 같은 생각으로 키가 큰 나무들을 다 다듬어놓고 작은 나무들만 남겨 놓은 터였다. 이거 괜히 챙겨왔다, 툴툴거리며 우영이 바닥에 눕혀 놓은 사다리 옆면을 약하게 걷어 찼다. 억울하게 얻어맞은 철제 사다리가 포도밭 흙 위에서 덜컹거린다. 우영이 누가 봐도 하기 싫은 표정으로 입술을 내밀고 작은 나무의 가지를 하나 둘 억지로 잘라내다 이내 양손가위를 저멀리로 던져버린다. 농장주의 조카이자 우영의 작업을 감시하는 역할의 토마스는 혈연으로 관리자 자리 꿰찬 사람답게 어제 멋대로 조기 퇴근한 후 숙소에도 들어오지 않고 무소식이었다. 우영은 이런 날을 놓치지 말자는 마음으로 아까 제가 걷어찼던 사다리를 일으켜 세우고 꼭대기로 올라가 걸터앉았다. 높지 않은 사다리였지만 우영은 그 꼭대기를 좋아했다. 강한 햇빛에 달궈진 짙은 색의 흙이 뱉어내는 열기도 덜하고 고작 조금 더 높아졌다고 공기도 더 시원했다. 선글라스를 벗고 사다리 위에서 양발을 까딱거리며 구름이 드문드문 보이는 하늘 아래 바람을 한참 동안 느끼던 중 시끄러운 배기음을 내며 대문을 가로질러 들어오는 토마스의 차가 우영의 시야에 들어왔다.
"알아서 일 잘하니까 안 와도 되는데."
우영이 사다리에서 가볍게 점프해 내려온다. 토마스는 항상 그랬듯이 농장 일은 모두 내게 떠맏기고 차로 두 시간을 열심히 달려 도착한 선샤인 코스트의 펍에서 각별한 친구들과 술을 퍼마셨을 것이다. 아니면 조금 더 가까운 누사에 갔을 수도 있고. 매번 번화가까지 덜덜거리는 똥차를 끌고 가 용케도 귀가하는 꼴을 보고 있자면 저 자동차나 주인이나 대단하게 느껴진다. 우영은 아쉬운 표정을 숨기기 위해 작업조끼 윗주머니에 꽂아둔 선글라스를 꺼내 쓰며 천천히 숙소 앞에 멈춰 선 차를 향해 걸어갔다. 토마스가 숙취 가득한 얼굴을 하고 구부정한 자세로 천천히 운전석에서 내리고 있었다.
"Hi."
뭐 하다 왔는지 안 물어봐도 뻔한 행색에 우영은 대충 외마디 인사를 건넨다. 알코올 향이 짙은 숨을 내쉬며 힘겹게 차 문을 닫은 토마스가 우영에게 대충 손을 휘저으며 숙소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한쪽 눈을 찡그린 우영이 그 뒤를 따랐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섰던 우영 덕분에 숙소 내부엔 서늘한 냉기가 살짝 돌았다. 냉장고에서 2리터짜리 생수병을 꺼낸 토마스가 그걸 다 마셔버릴 기세로 들이키다 마지막 모금을 잔뜩 바닥에 흘리며 생수병을 내려놨다. 우영이 눈을 찡그릴 때보다 더 큰 모션으로 얼굴을 구겼다. 닦지도 않는 놈이 흘리고 난리야.
"I hate to live like this."
갑자기 닥친 강한 표현에 우영이 섬짓 놀란다. 이새끼 뭐라는 거야. 그동안 한 게 뭐 있다고 이렇게는 살기 싫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우영은 자신보다 형인 토마스를 동생처럼 대하고 달래주는 게 익숙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토마스의 불만을 다 받아주며 그의 이야기를 들어줬다. 대충 요약하면 토마스는 수확이 끝난 겨울의 밭일이 너무나도 지루해 못 참겠다는 의견이었다. 그럼 매일 똑같은 일 하는 나는 안 지루하냐고 머리를 세게 때려 주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우영이 억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런 억지 웃음에도 이상함 하나 못 느끼는 단순한 성정의 토마스가 우영의 다정한 태도에 감동받아 슬그머니 안겨 왔다. 우영은 이번에는 진짜 질색하며 뒤통수를 후려쳤다. 토마스가 얻어맞은 뒤통수를 감싸쥐며 나 어떻게 해야 하냐고 우영에게 당당하게 해결책을 요구했다. 그걸 왜 일터 동료이자 어떻게 보면 부하 직원인 자신에게 묻는지 궁금했지만 이럴 때마다 토마스가 원하는 답을 줬던 우영이었기에 나름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이번에도 대충 원하는 답을 던져주면 되는 것이다.
"Go on vacation!"
너네 삼촌한테 휴가 달라고 부탁해볼 테니 쉬어라, 이렇게 말해줬더니 역시나 점점 텐션이 올라가는 토마스를 보며 우영도 내심 이 숙소를 혼자 쓸 생각에 기뻐하고 있었다. 세 명이 지낼 수 있게 꾸며진 숙소는 거실과 주방을 사이에 두고 토마스가 2인실을, 우영이 1인실을 쓰고 있었다. 우영이 블루베리를 따러 들어왔던 몇 달 전부터 농장의 일꾼은 항상 두 명이 전부였다. 한껏 기분이 좋아진 토마스가 방으로 들어가고 우영도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몸을 눕혔다. 우영은 약속한 대로 꽤 심각한 목소리를 장착하고 농장주에게 전화로 상황을 설명했다. 조카를 꽤 아끼는 그가 잠시 동안의 고민 끝에 네 말대로 하겠다며 토마스에게 충분한 휴가를 주겠다고 선언했다. 우영은 그 충분한 기간 동안 자신도 쉴 수 있겠다는 기쁨을 억누르며 통화가 끝날 때까지 시무룩한 목소리 톤을 유지했다.
삼촌에게 연락을 받은 건지 토마스는 점심도 거르고 신나게 투박한 보스턴백 안에 본인은 귀중품이라 주장하는 잡동사니들과 옷가지를 던져 넣었다. 인상을 살짝 찌푸린 채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우영은 조용히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방문을 닫자마자 키득키득 새어나오는 웃음을 애써 숨겨본다. 친구이자 룸메이트이자 우영을 감시하는 역할이었던 토마스가 며칠 동안, 어쩌면 꽤 길게 집을 비운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끼쳐오는 자유로운 분위기에 우영의 팔다리가 침대 위에 나른하게 뻗쳤다. 잠시 후 짐이 가득 채워진 가방 몇 개를 차 트렁크에 던져 넣는 토마스는 아까의 칭얼대던 표정은 어디 가고 미소를 지은 채로 우영에게 대충 인사했다. 언제 올지는 모르겠지만 내 생각 하고 있으라는 장난인지 같잖은 경고일지 모를 말을 건넨 토마스는 요란스러운 시동 소리와 함께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대문 너머로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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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날부터 우영은 오후 늦게 노을이 질 때부터 일을 하기 시작했다. 농사 짓는 사람의 출근 시간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시간이었지만 우영에겐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감시꾼이 없으니 해 뜨기 전부터 출근하기는 싫었고 오전부터는 이미 햇빛에 땅이 달궈져서 끓어오르니 실내에서 체력을 보충하다 저녁때쯤 나가서 주어진 할당량을 해내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영은 밤이 너무 깊어져 헤드라이트가 쓸모없을 정도로 어두워지면 하기로 했던 일들을 내버려두고 미련 없이 퇴근했다. 며칠 후 관리받지 못한 포도나무들은 푸석한 겨울 흙으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하고 말라 비틀어져갔다. 우영은 그런 꼴을 쳐다보지도 않고 방치했다. 아무도 없는 숙소 주택과 광활한 포도나무밭이 온전히 내 것 같았다. 우영은 점심시간이 다가오면 침대에서 느긋하게 일어나 주방에서 점심을 먹고 거실 쇼파에 누워 줄이어폰으로 노래를 들었다. 호주 밴드의 노래를 틀고 발을 까딱거리는 여유를 즐기며 우영은 잠시 눈을 감았다. 손을 대지 않은 휴대폰 속에서 노래가 다음 곡으로 계속 넘어가길 반복하던 중 우영의 왼쪽 귀에서 갑자기 이어폰이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우영이 확 눈을 뜨며 이어폰이 빠진 쪽으로 몸을 틀었다.
쇼파에서 상체를 비스듬히 일으킨 우영의 눈 앞에는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 자신의 얼굴을 내려보고 있는 처음 보는 사람이 있었다. 우영은 놀란 채로 몇 초간 정지해 있다 남자의 고개를 피해 빠르게 상체를 완전히 일으켜 멀찍이 앉았다.
"누, 누구세요?"
놀란 눈을 한 우영이 스스로의 몸을 더듬으며 감각을 느꼈다. 이게 꿈이 아니라니. 우영은 계속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반면 낯선 얼굴의 남자는 살짝 긴 기장의 검정색 머리칼을 정리하며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조용한데 문이 열려 있길래 들어왔어요. 연락 못 받으셨나 봐요."
"무슨 연락..."
우영은 귀에 내내 꽂혀 있던 나머지 이어폰을 급하게 빼며 휴대폰 화면을 켰다. 약 이십 분 전쯤 발신자명 사장으로 도착한 메세지 하나가 있었다. 대체 인력 구했으니 교육 좀 해달라는 짧은 문장이었다. 농한기에 1인분도 안 하는 놈 잠깐 빠진다고 새로운 사람을 구할 줄은 몰랐는데.
"연락을 지금 확인했네요. 죄송합니다. 저쪽 방에 일단 짐 정리하시죠."
갑자기 닥친 혼란스러운 순간이 지나고 문득 우영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
"저기요."
"네?"
"한국 사람이에요?"
그걸 서로 한국말 쓰는 상황에서 굳이 되짚는 우영이었다. 조금 긴장이 풀린 성화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네. 저도 똑같이 물어볼까요?"
그제야 상황이 파악된 우영이 으, 하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뒤돌았다. 성화는 며칠 전까지 토마스의 방이었던 공간으로 들어가 메고 온 백팩을 내려놓고 단촐한 짐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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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킹홀리데이 비자로 며칠 전 입국했다는 성화는 임시 숙소에서 지내며 동부 한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가지치기 구인 공고를 보고 농장주와의 간단한 전화 인터뷰 후 다음날인 오늘부터 바로 일하라는 말을 듣고 왔다고 했다. 우영은 쓸데없이 빠른 고용주의 일처리에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우영은 숙소에서 나가기 전 성화에게 긴팔이든 팔토시든 맨살 나오는 일 없게 잘하라고 큰소리쳤으나 오늘은 구름이 끼어 조금 어두운 하늘이었다. 평소라면 뜨거웠을 한창 오후의 시간인데 괜히 껴입게 한 우영만 머쓱해지는 일하기 좋은 날씨였다.
우영은 앞장서 오늘 일해야 할 구역으로 성화를 끌고 갔다. 지나쳐온 나무들과 달리 우영이 멈춰선 곳의 나무들은 아직 다듬어지지 않아 앙상한 고동색의 가지들이 힘없이 매달려 있었다. 우영은 성화의 손에 양손가위를 들려 주고 자신은 한 손에 쥐어지는 작은 가위를 들어 가지들을 잘라냈다. 성화는 갑자기 두 손에 들린 묵직한 가위를 만지작거리며 우영의 행동을 지켜보는 동안 우영은 성화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나무를 다듬어갔다. 반대편 손은 거의 쓰지 않은 채 한 손으로 능숙히 가위질을 이어가던 우영이 너무 조용한 주변을 느끼고 뒤돌아보자 성화는 아직도 가만히 서서 가위를 만지고 있었다. 우영은 아차 싶었는지 성화에게로 가까이 걸어오며 자신이 들고 있던 가위를 땅바닥으로 던졌다. 우영은 성화의 손에 힘없이 들린 양손가위를 뺏어 들었다.
"이런 거 처음 해봐요? 식물 기르기, 화단 가꾸기, 밭일, 뭐 그런 거."
"꽃 받고 줄기 잘라서 유리병에 꽂아 둔 적은 있어요."
"아, 꽃다발. 언제?"
"고등학교 졸업식...?"
졸업식 때 받은 꽃다발 오래 보고 싶어서 손질하고 꽂아놨다는 성화의 말에 우영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푸하하 웃었다. 성화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저 우영을 쳐다봤다. 겨우 웃음을 그친 우영이 티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리며 성화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재밌는 남자였네. 오늘 처음 해본다니까..."
우영은 성화의 등 뒤로 와서 힘없이 가위 손잡이를 쥐고 있는 성화의 양 손등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쳐 가위를 들어올렸다. 우영은 성화의 등 뒤에서 그 앞의 나무로 바짝 붙었다. 성화의 발도 우영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겨울엔 얘네가 살아 있기만 하면 되거든요. 그래서 잘라낼 가지 알아보는 방법도 쉬워요."
"......"
"썩은 거. 말라 비틀어진 거. 그런 것만 잘라내고 지지대 잘 붙어 있는지 봐주고."
우영은 짧은 설명 뒤 여전히 양손을 겹쳐 잡은 채로 가지를 쳐냈다. 긴 침묵의 시간 동안 성화는 우영의 손의 움직임을 시선으로 쫓으며 침을 삼켰다. 일은 어려워 보이지 않았으나 성화의 등과 우영의 상체가 맞닿은 채 옆 나무로 성화를 이끄는 우영의 몸에 성화는 그대로 더 긴 시간이 흐르도록 놔뒀다.
"이제 알겠죠."
손이 멀어지며 조금의 여운도 없이 우영이 바로 몸을 떼내자 성화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돌려 우영을 바라봤다. 아직 멀리 떨어지지 못한 우영이 성화를 보며 걸음을 멈춰섰다. 잠시 얼어붙은 성화의 얼굴 맞은편엔 물음표가 띄워진 표정의 우영이 있었다.
"아, 아니에요."
얽힌 시선을 뒤로 하고 성화가 뒤돌아 가위를 고쳐 잡고 우영의 손짓을 서투르게 따라해봤다. 우영을 쳐다보느라 가위 끝에선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똑바로 보지 못했다. 분주한 행동과 달리 느린 일처리를 우영은 가만히 서서 지켜봤다.
-
짧게 일을 하고 숙소로 돌아온 둘은 어색한 분위기 속 나른해진 몸으로 각자의 방에 들어갔다. 방문을 닫은 우영은 땀에 약간 젖은 검은색 긴팔 티셔츠를 밑단부터 들어올리며 벗어 던지고 침대에 맨살을 대고 풀썩 누웠다. 그리고 성화에게 처음 일을 알려주던 그 순간을 생각했다. 어떠한 의도도 없었고 몸을 붙이고 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몸이 맞닿은 면으로 규칙적인 두근거림이 전달되고 있음이 어느 순간부터 느껴졌다. 내 자세가 불편했나. 설마 텃세, 그런 거로 느꼈으려나. 진짜 아닌데. 신입 나가면 귀찮은데. 온갖 잡다한 생각이 한순간 들이치며 우영이 침대 위에서 벌떡 일어났다. 우영은 평소 잘 신지 않는 실내화 슬리퍼를 겨우 꺼내 신고 질질 끌며 성화의 방 앞으로 향했다.
노크를 하려 손을 들었다가 혹시 잠들었을까 싶어 나무로 된 삐그덕거리는 방문에 조심스럽게 한쪽 귀를 가져다댔다. 귀가 문에 닿지 않도록 양팔을 문 옆 벽에 대고 상체를 가까이 가져가봐도 문 너머에서는 아무 소리도 느껴지지 않았다. 우영은 벽에서 손을 떼고 방문을 등지고 서서 노크를 할지, 아니면 허락도 없이 안에 들어가볼지 고민했다.
"어쩔 수 없지. 자는 사람 깨우면 짜증 나잖아."
그런 핑계로 우영은 노크를 생략한 채 조심스럽게 성화의 방문을 열었다. 오른쪽 벽에 바로 붙어 있는 침대 머리맡에는 역시나 자고 있는 성화의 얼굴이 보였다. 우영은 잠시 서서 성화를 지켜보다 성화가 꽤 깊은 잠에 들었다는 것을 눈치채고 더 가까이 가서 침대 옆에 무릎 꿇고 앉았다. 처음 만났을 땐 반대였잖아. 그런 생각이 들자 우영의 입가에는 미소가 띄워졌다. 우영은 팔짱을 끼고 침대에 앉아 한참 동안 성화의 얼굴을 쳐다보다 조용히 거실로 나갔다.
해가 다 넘어가고 저녁이 되어서야 잠에서 깬 성화가 방에서 나왔을 때는 우영이 간단한 저녁거리를 식탁에 올리고 있었다. 투박하게 만든 미트 파이, 접시에 올리기만 한 나쵸, 칠리 소스, 방금 파낸 아보카도로 만든 과카몰리와 유리잔 두 개가 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우영은 성화가 처음 보는 라벨의 은색 뚜껑 위스키 병을 찬장에서 꺼내 왔다. 갑자기 등장한 술병에 성화의 눈이 조금 커졌다.
"술 자주 마셔요?"
"자주 안 마셔서 오늘 먹으려고요. 술 마시죠?"
"가끔은요."
"원래 일하던 애는 술 안 마셔줬거든요."
번화가 술집에서 친구들이랑 밤새 퍼먹고 오느라. 자세한 설명은 필요 없을 것 같아 우영은 뒷말을 삼켰다.
"호주 양조장에서 만든 위스키예요. 호주에도 좋은 술이 많더라고. 한국에서는 못 사요."
우영이 성화의 잔에 빠르게 위스키를 채웠다. 성화는 급하게 컵을 살짝 들어올렸다.
"여기 한국 아니니까 예의 차리지 마요."
"아..."
그리고 둘은 통성명을 하고 성화가 한 살 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우영은 그를 형이라고 부를 생각은 없었다. 방금 말했듯이 여긴 한국 아니니까. 성화도 우영의 잔에 위스키를 따랐고, 서로의 잔을 가볍게 부딪힌 후 우영은 한번에 잔을 비웠다. 성화는 위스키를 입에 조금 머금고 맛을 느낀 후 삼켰다. 알코올 맛이 강하게 느껴졌지만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술이 들어간 후 둘의 분위기는 낮과 달랐다. 나이가 비슷한 한국 청년들은 반말을 쓰며 호주에 온 이유부터 언제까지 일하다 돌아갈 건지 깊은 이야기를 서슴없이 나눴다. 우영은 한국에서의 반복되는 삶이 재미없다고 생각해 스스로를 곤경에 빠뜨리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살아 있음이 느껴지지 않을 것 같았다. 힘든 일을 해볼까, 연고 없는 시골에 가서 처음 해보는 일을 해볼까 고민하던 중 아예 해외로 나가면 인생 난이도가 확 올라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영은 딱히 학업에 뜻이 없었기에 유학 말고 일만 하다 올 수 있는 워킹홀리데이를 선택했다. 해 쨍쨍한 날씨가 좋으니까 나라는 호주로. 출발 전엔 영어로 하는 대화가 익숙하지 않았지만 우영은 붙임성도 좋았고 새로운 언어를 쉽게 익히는 편이었다. 두어 곳의 일터를 단기로 옮겨 다니다 이 포도나무밭에서는 어쩌다 보니 여름부터 지금까지 일하고 있었다. 농사가 망하거나 도망가지 않는 한 당분간 이곳에 있을 것 같았다.
사실 그래서 우영은 한국을 떠나올 때보다 지금이 더 고민인 시기였다. 작업은 반복되고 항상 같은 사람과 일하는 것이 또 따분하게 느껴졌다. 이젠 의사소통도 잘 돼서 더 이상의 곤경이 없었다. 매일 밤 잠들기 전 도망을 단행해야 하나 찔끔찔끔 고민하던 때에 하나뿐인 직장 동료가 자리를 비우고 새로운 사람과 일하게 된 것이다. 갑작스럽긴 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한테 천천히 쉬운 것부터 일을 알려주는 순간 우영은 오랜만에 생기를 느꼈다.
성화는 한국이 지긋지긋해서 왔다거나 그런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잠시 학업을 쉬어가고자 휴학 후 언어 공부 겸 가벼운 마음으로 왔고 임시 숙소에서 첫 일자리를 알아보던 기간 동안은 조금 힘들었으나 사장과의 통화를 잘 끝내고 첫날 일도 무사히 마쳤다는 거에 뿌듯해했다. 우영은 그를 보며 좋은 성격을 지녔다고 생각했다. 나도 저런 부드러운 사람이었으면 한국에서 무난히 잘 살지 않았을까 상상하며.
둥그런 미트 파이 반절이 사라지고 식탁 위에 나쵸 부스러기가 굴러다닐 때쯤 성화는 테이블 위에 턱을 괴고 눈을 감았다. 우영도 알딸딸했으나 많이 취한 꼴의 성화를 보자 정신이 드는 듯했다. 우영은 마지막으로 잔에 남아 있던 위스키를 입에 털어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영은 성화의 옆구리를 세게 쥐어 그를 들어올렸다. 술기운에 취해 의식이 몽롱한 사람은 물에 빠진 볏짚더미처럼 축축 늘어지고 한없이 무겁게 느껴진다. 그러나 우영은 얼른 그를 눕혀 주고 싶었기에 한순간도 삐끗하지 않고 성화를 부축해 방으로 끌고 갔다. 성화의 고개가 흔들리며 머리카락이 우영의 뺨을 간지럽혀 다리에 힘이 풀릴 뻔했지만 간신히 무릎에 힘을 주고 일어나 성화를 침대에 내려놨다. 밤에 내려다보는 얼굴은 낮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낮에는 자는 얼굴에서도 피곤함이 드러났었는데 지금은 헤실헤실 웃으며 기분 좋게 자고 있었다.
우영은 성화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거실로 나와 먹은 것들을 정리했다. 고무장갑을 끼고 애벌 설거지를 하고 식기세척기 안에 그릇들을 차곡차곡 세워두는 동안 우영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성화는 곧 몸에 일이 익을 것이고 우영은 그걸 지켜보며 옆에 같이 있을 것이다. 내일 아침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궁금해졌다. 굳이 불안한 점이 있다면 성화는 잠깐 있다 사라질 토마스의 대체 인력이라는 거? 사실 불안하지 않았다. 우리는 호주에 함께 있을 것이며 한참 뒤에는 한국에 둘 다 있을 것이다. 우영에겐 새로운 사람과 한없이 가까워지고 의지하는 일이 뜸했다. 성화를 처음 본 순간부터 고작 하루 동안 우영이 느낀 점은 성화가 좋다는 거. 그러니까 꼭 반했다든가 연애감정 사랑 그런 게 아니더라도, 그런 게 맞을 수도 있고. 혈관의 뜀박질이 느껴진 순간부터 우영도 같은 속도로 심장이 뛰기 시작한 것 같다. 이젠 침대에서 쓸데없는 잡생각 없이 바로 잠에 들 수 있을 것 같다.
우영은 다음날 동이 트기도 전 이른 아침에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