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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와 나태 사이, 나의 구원자

by. 슝슝

간만에 쉬는 날인데, 성화는 아쉬움을 겨우 달래며 폭우가 쏟아지는 창 밖을 바라봤다. 성화는 보통의 사람들처럼 보통의 삶을 열심히, 남들처럼 치열하게 살아왔다. 그래도 누구나 그렇듯 출근할 생각만 하면 짜증이 나다가도 막상 출근하면 못해도 남들만큼은 열심히 일하곤 했다. 요 근래 들어 점점 당연했던 것들에 회의감을 느끼기 전까진 말이다.

어차피 내가 열심히 해도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는데, 내가 굳이 열심히 살 필요가 있나? 성화의 커리어에는 남들 다 가진다는 흔한 공백 한 줄 없었다. 입시도, 취업도, 이직도 운좋게 모두 제 때 바로바로 이어졌기 때문에 아무것도 안 하고 쉬었던 적이 없었다. 어쩌면 이렇게 현실에 대한 권태감이 찾아온 것도 당연했다.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쉬는 방법을 몰랐다. 쉬는 날엔 사람들을 만나고, 가족들을 만나고, 다시 또 내일을 준비하고. 성화 스스로를 돌보며 쉬었던 시간이 없었다.

성화는 문득, 휴직(안 되면 퇴사)을 결심했다. 한 달 정도만 휴직할 수 있다면, 쉬고 싶었다. 안 받아준다면 퇴사라도 할 생각이었다. 다행히 지금 회사는 꽤 오래 다닌 덕분에 퇴직금 받으면 두세달은 일을 안 해도 먹고 사는 데 큰 지장이 없었다. 정 안되면 본가라도 내려갈 생각이었다. 성화의 부모님은 타향살이에 지친 아들을 내칠 분들은 아니셨으니까. 여러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가는 동안, 창문을 뚫을 기세로 쏟아지던 비는 언제 그랬냐는 듯 완전히 그쳐있었고, 구름 사이로 햇빛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때, 성화의 핸드폰이 울렸다. 스팸이겠거니 하고 덮어버린 성화는 누워있던 자세 그대로 스르륵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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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깨니 집안이 어두컴컴했다. 몇 시간이나 잔 거야. 시계는 성화가 꽤 오래 잤다는 걸 알려주기라도 하듯 아까 잠든 시간과 비슷한 위치에 시곗바늘이 멈춰 있었다.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한 성화는 일어나서 못한 일들을 정리해두고 자야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하고 싶지 않았다. 집에서까지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를 못 느꼈다. 정말 다행히도 내일까지 쉬는 날이라 성화는 생각을 멈추고 가만히 천장을 올려다 봤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출근이고 월급이고 다 필요 없었다. 다들 말하는 노잼 시기가 이런 건가? 다시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며 늘어졌다.

그때, 발치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당연히 혼자 있어야 할 집 안에 누군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자 파드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처음 보는 사람이 성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금발의 머리카락에, 인간이 아닌 것만 같은, 신비로운 느낌의 남자. 남자의 등에는 붉은 깃털이 빼곡히 들어찬 커다란 날개가 돋아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빛을 내는 눈동자가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겁에 질린 성화는 손을 덜덜 떨었다. 남자가 누구인지 물어보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저 눈물만 뚝, 뚝 떨어트리는 게 전부였다. 날개를 접은 검은 옷의 남자가 성화에게 다가와 성화의 턱을 가볍게 쥐었다.

"겁먹지 않아도 돼. 널 해하려 온 게 아니란다. 벗어나고 싶지 않니?"

처음 듣는 남자의 목소리는 꽤나 저음이었지만 부드러웠다. 성화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싱긋 웃은 남자가 성화의 손을 맞잡았다. 다른 손으로 성화의 눈을 살며시 가렸다. 다시 시야가 밝아졌을 때, 성화는 아무도 없는 한적한 바닷가에 도착해 있었다. 성화가 그리워했던 고향의 바닷가와 닮은,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시원하게 바다냄새를 머금은 바람이 성화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어느새 남자는 한결 가벼운 셔츠와 반바지 차림으로 변해있었다. 남자가 성화의 손을 다시 잡았다.

"여기서 지내고 싶은만큼 지내면 돼. 네가 걱정하는 일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여기서 흘려보내는 시간은 네가 원래 지내던 곳의 1000분의 1도 안 될만큼 천천히 흘러갈테니까."
"돌아가고 싶어지면요?"
"언제든 말만 해. 하지만 돌아가면 다시는 여기로 올 수 없다는 것만 알아둬."
"아, 왜 저한테 이렇게까지 해주시는 거예요?"
"네가 날 불렀잖아. 살려달라고."
"제가요?"

성화가 도저히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남자는 어깨를 한 번 으쓱 하더니 조금 쉬고 싶다며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남자의 이름은 여상이라고 했다. 오늘 처음 봤지만 왜인지 기시감이 들었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일단 쉬는 게 좋을 것 같아 성화는 거실에 있는 소파에 몸을 뉘었다. 여상의 말에는 힘이 있었다. 성화는 여상이 말한대로 이 곳에서의 시간을 즐기기로 했다. 사실 현실이 어떻게 되던 성화에게는 이제 다 상관 없었다. 거실에 난 커다란 창문이 성화의 시야 가득 바다를 채워주었다. 성화가 걱정했던 크고 작은 일들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고, 성화의 핸드폰은 꺼진지 오래였다. 자고 싶은만큼 자고, 일어나서 여상과 함께 식사를 하고, 바깥 공기가 생각나면 바닷가를 원없이 걸었다. 바닷물에 몸을 맡기기도 하고, 들어와서 씻고 나면 나른하게 졸음이 쏟아져 내렸다.

여상은 그저 성화의 곁을 묵묵히 지켰다. 같이 식사를 하고, 바닷가에서 산책을 하고, 잠든 성화에게 이불을 덮어주곤 했다. 성화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가끔은 외로워하는 성화의 손을 잡아주곤 했다. 성화가 원한다면 기꺼이 품도 내어주었다. 더 이상 셀 수 없을만큼 여러 날이 지나고, 성화가 여상에게 의지하는 날들이 거의 매일이 될 때 즈음에, 성화가 여상의 방을 찾았다. 여상은 성화가 올 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익숙하게 곁을 내주었다. 자연스레 여상의 허리를 끌어안은 성화가 작게 속삭였다. 너무 오래 있는 것 같아.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드는데, 너랑 헤어지고 싶지 않아. 내 마음을 모르겠어. 여상은 성화의 머리를 쓸어넘겨주고는 이마에 짧게 입맞췄다.

"뭐든, 네가 하고 싶은대로 해. 나는 널 위해 존재하니까."
"너는 사람이 아니잖아. 원래 어딘가에 항상 있던 존재야?"
"네가 태어나면서 이 세상에 존재했고, 내 소임을 다 하면 사라질 거야. 아마, 여기서 네가 떠나는 날이 되겠지."
"원망스럽진 않아? 너를 위한 삶이 아니잖아."
"그게 내 존재의 이유니까 괜찮아. 널 아끼고 사랑하는 누군가의 염원이 날 만들어낸 거야."

여상의 담담한 말투에도 성화는 속상한 듯 연신 여상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입술이 맞닿은 건 찰나의 충동이었다. 연민, 안쓰러움, 속상함 혹은 제 스스로에 대한 위로. 여러 감정이 뒤섞인 행동에도 여상은 덤덤하게 성화의 키스를 받아내고만 있었다. 맞닿은 볼 사이로 성화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후회였을까? 아니면 아쉬움? 아직까지도 성화는 그날의 키스에 대해 정의내릴 수 없었다. 여상에 대한 마음을 정의한 날, 성화는 자신이 떠나는 게 여상과 성화 모두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여상에게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이 밤이 지나고 바다 끝에서 새로운 태양이 떠오를 때에 슬프지 않은 마지막 인사를 나누자고. 너와 나는 이렇게 마지막을 맞겠지만 널 위해 남은 생을 버텨보겠노라고.

다시 어두운 방 안에서 눈을 뜬 성화는 손에 남아 있는 붉은 깃털을 발견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이 세상을 떠나야 할 때 여상은 분명 그때 그 모습으로 성화를 반겨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귓가에 스치는 여상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하다. 내가 기다릴게. 아주 천천히 와야 해. 자고 일어나면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흘러가겠지. 하지만 성화는 한결 후련한 마음으로 새로운 하루를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상이 그립겠지만, 여상을 만나기 위해서는 이 세상을 다시 살아가야만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