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섷

Diving deeper

by. 하나로백

데뷔곡인 해적왕의 첫 무대까지 20일이 남았다. 매일 같이 이어지는 연습에도 박성화는 결코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데뷔 전 마지막이라는 다짐으로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연습실에서 가장 늦게 나오는 멤버다. 새벽 5시, 연습실을 아니 케이큐 사옥을 마지막으로 빠져나오던 성화는 이미 몸이 녹초가 된 듯했지만, 그럼에도 그는 보안 장치를 설정하고 모든 불을 끄는 것을 잊지 않았다. 성화는 자신의 성실함이 팀 성공에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팀 성공이 곧 자신의 성공이었기에.

건물 밖으로 나오니 어두운 밤은 끝나가고 있었다. 예상보다 밝은 하늘에 눈을 잠깐 찌푸리며 그 빛에 적응하며 시야가 뚜렷해질 때, 성화의 눈에는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맞은편 건물에 서 있는 사람은 정윤호다. 그는 같은 팀 동료다. 성화의 피곤한 얼굴에도 불구하고 윤호를 본 순간, 그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윤호에게 손을 흔들었다. 윤호도 가볍게 손을 들며 성화를 아는 척했다.

몇 달간 함께 노력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성화는 멤버들과 전우애를 느꼈기에 정윤호는 힘들어도 반가운 사람이다. 윤호도 마찬가지이니 자신을 웃으며 인사했으리라.

“형은 진짜 열심히 하네요,”

윤호가 성화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아직 안무가 완전히 몸에 안 익어서.”

성화는 아직 얼굴에 마르지 못한 땀을 손으로 쓱 닦으며 대답했다.

“아직 안 익숙한 게 당연하죠.”

“넌 나보다 빨리 외우더라. 부럽다.”

“각자 잘하는 게 다른 거죠.”

윤호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난 안무 외우는 건 빨리 되고, 형은 다른 데 강점이 있잖아요.”

성화는 잠시 멈칫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그리고 우리 곧 데뷔하잖아.

그때부터는 말 놔야 한다고 했던 거 기억하지?"

윤호는 잠시 당황한 듯 두 눈이 동그래졌지만, 곧 웃으며 대답했다.

"아, 그랬지. 아직 잘 안 익숙하네요."

성화는 윤호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데뷔를 앞둔 긴장된 상황에서도 윤호는 여전히 한결같았다. 성화는 윤호가 연습실에서 완벽하게 보일 때도 있지만, 때로는 긴장해서 놓치는 부분도 있다는 것을 보고 미소를 머금었다. 그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이 오히려 친근하게 느껴졌다. 같은 연습생이라는 동질감.

“그런데 아직 안 갔어? 누구 기다려?”

윤호는 잠시 멈칫하더니 조용히 말했다.

“형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어?”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방금까지도 피곤함이 몰려와 졸음에 겨우 눈을 뜨고 있던 성화의 정신이 확 깨어났다.

"나를?"

윤호의 얼굴은 순식간에 굳어졌다. 성화의 놀란 반응에 긴장한 듯 보였다. 그는 잠시 숨을 가다듬고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윤호의 표정에는 자신감과 떨림이 교차하고 있었다.

“형, 사실... 좋아해요. 우리 연애해요.”

순간 공기가 얼어붙는 듯했다. 성화는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데뷔를 눈앞에 두고 팀 내에서 이런 고백을 들을 줄은 상상조차 못 했기 때문이다. 윤호의 목소리에는 떨림이 있었지만, 그의 눈빛에는 확신이 서려 있었다. 성화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성화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윤호가 한 마디 더 이어 나가기를 기다렸지만, 윤호는 그저 성화를 바라보며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윤호가 성화를 좋아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이 아니다. 몇 달 전부터였다. 하지만 그는 그 감정을 표현하지 못한 채 속으로 눌렀다. 왜냐하면 윤호는 같은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높은 확률로 거절이란 걸 스스로 잘 알았다.

그러던 도중, 지난주 윤호는 우연히 숙소에서 성화가 만지작거리는 스마트폰 화면을 엿보게 되었다. 그때 성화가 열어본 앱이 그를 놀라게 했다. 게이 전용 소셜 앱, 흔히 '게이계의 틴더'라고 불리는 그 앱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윤호에게 강렬한 희망을 안겨주었다.

‘형도 남자를 좋아하는구나... 나한테도 기회가 있지 않을까?’ 거절의 확률이 낮아졌다. 그때부터 윤호는 성화에게 마음을 표현할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팀에서 연습을 가장 오래 하는 사람은 박성화다. 항상 연습실에 마지막까지 남아 안무를 점검하고 또 점검했다. 그 모습을 윤호는 사랑했다. 이미 멋진 사람이 더 완벽해지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매력적이었다. 윤호는 열정이 넘치는 성화 옆에 함께하고 싶었다. 같은 그룹의 멤버 그 이상의 밀접한 사이로 지내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연습이 끝날 때까지 성화와 남아서 연습한 적도 종종 있었다. 성화에게 윤호는 같이 남아있는 에이티즈 멤버일 뿐이지만, 윤호에게 이 시간은 성화와 오붓하게 있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연습이 끝나는 시간이라면 윤호가 성화를 찾아갔을 때 무조건 단둘이 있을 수 있다. 데뷔 직전 단체생활이 많은 상황에서 유일한 기회다.

게다가 성화가 자신을 받아주냐를 생각해 봤을 때 데뷔 전후가 최적의 시점이다. 일반적인 아이돌 그룹은 데뷔 이후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스마트폰 반납을 하고 모든 멤버들의 외출도 제한된다고 들었다. 그 뜻은 연애도 내부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자유롭게 사랑하기 어려울 상황에 곁에 있을 사람을 만나보라고 제안하고 싶었다.

성화가 정윤호 자신을 성애적으로 좋아할지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그것은 어느 타이밍이 되었던 복불복이었기에 윤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갓 성인이 된 20살, 어린 정윤호가 신경 쓴 것은 박성화가 남자를 좋아하고, 그 남자가 자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긍정적인 마음이 차오른 결과가 지금이다.

막상 입으로 마음을 표현하고 나니, 고백이 너무 성급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머리를 스친 건 성화의 눈빛이 차갑다고 느끼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그 순간, 성화의 답이 돌아왔다. 그것도 굉장히 단호하고 빠르게.

“윤호야.”

“어.”

“나 남자 좋아하는 건 맞아. 그런데... 연애 생각은 없어.”

마치 성화의 대답은 준비된 듯 차분하며 확고했다. 윤호는 그 말에 숨이 멎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윤호가 기대했던 답이 아니었다. 아니, 예상해 본 적 없던 답이다. 성화의 수십 가지 반응을 상상하며 고백을 준비했었다. ‘미안해, 넌 내 스타일이 아니야.’ 혹은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같은 예상 가능한 대답과 달리, 박성화의 반응은 그 모든 시나리오를 빗나갔다.

윤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성화를 바라보았다.

연애 자체를 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미라 반박할 틈이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성화의 눈빛은 그 의미를 더 강화하듯 흔들림이 하나도 없었다. 굳건한 성화 앞에서 윤호의 마음은 진정되지 못했다.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어색한 미소를 지은 윤호는 조용히 말했다.

"아... 그렇구나. 미안해, 갑자기 이런 말 해서."

성화는 윤호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하지 마. 그냥... 지금은 연애할 상황이 아니야. 네 마음은 고마워."

다정한 박성화답게 윤호의 감정을 최대한 존중하려고 했다. 윤호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듯 말투는 조심스러웠고, 표정은 연습생 수업 중 배운 인터뷰 스킬을 쓰는 듯 따뜻한 표정을 의도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단호한 거절은 윤호에게 충분히 전달되는 중이다. 현재 박성화에게 정윤호는 우선순위에 놓일 기회가 없다는 뜻. 성화는 데뷔를 앞둔 상황에서 연애하게 된다면 자신의 집중력이 흐트러질 것을 알고 있었다. 누군가를 만나 인연을 시작하는 것을 20대 초반 박성화는 고려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아이돌로의 데뷔, 그리고 성공만이 가득했다.

윤호는 한동안 성화를 쳐다보기만 했다. 지금 어떤 말을 해도 성화의 마음을 얻을 수 없기에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두 사람 사이의 공기는 어색하게 채워졌다. 성화는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나기 위해 몸을 돌렸다. 서먹해진 분위기를 피하고 싶음도 있으나 이미 늦은 시간 시간을 지체하면 내일 컨디션에도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나 이제 들어가야겠다. 너무 늦었네. 너도 얼른 들어가."

성화는 그렇게 자리를 떠났고, 윤호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머릿속은 어지러웠다. 고백이 실패로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어딘가에서 아직 희망을 버리지 못했다.

성화는 숙소까지 가는 첫차 버스를 탔지만, 윤호는 숙소까지 혼자 새벽길을 걸으며 성화의 말을 되뇌었다.

[남자는 좋아하지만, 연애할 생각은 없다…]

윤호를 밀어낸 단호한 한마디였지만, 그 안에서 희망의 조각을 찾고 싶었다. 수십번 이 문장을 입 밖으로 내뱉으며, 스스로 기회가 있다고 설득했다.

“성화 형이 지금은 아니라고 했지만, 언젠가 기회가 올 거야.”

윤호는 성화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거절되었다고 마음을 접을 수 없기 때문이다. 거절하는 순간조차도 박성화는 사랑스러웠다. 연애할 상황에 옆자리는 정윤호, 자신이 되고 싶었다.

 

***

 

윤호의 희망과는 달리, 성화의 마음가짐은 단단했다. 태풍에도 흔들리지 않는 나무처럼 강인하게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듯했다. 성화는 자신의 실력, 외모, 팬서비스 등 아이돌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자신이 구축하고 있는 아이돌 자아가 방해받지 않도록 철저히 스스로를 관리하고 외부 요소를 통제했다.

데뷔 초반의 외출 금지와 스마트폰 사용 금지령이 풀린 이후에도 성화는 제한적인 자유만을 즐겼다. 팀원 대부분이 외출을 즐기고, 아이돌 타 그룹의 친구들과 친해지는 과정을 통해 스트레스를 해소하며 재충전을 시간을 가졌지만 성화는 그저 묵묵히 자신을 유지하는 데 집중했다. 아무런 동요 없이, 어떠한 일탈도 없이 박성화의 일상은 철저히 관리되고 있었다.

멤버 중 누군가는 이러한 성화를 보고 마치 종교 수행하는 수도사 같다고 말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조용히 맛있는 걸 먹고 오거나, 새로 산 레고를 조립하거나, 청소하는 모습이 무해해 보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종교인이 이 행동을 하는 이유와 유사했다. 성화의 하루는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서 생길 불필요한 감정 소모와 문제를 차단하는 행동이 맞았다. 원래 알고 지내던 사람들과의 소통이 더 중요했고, 새로운 만남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감정적 갈등이나 문제를 최대한 배제하고자 했다. 방송국 내 플러팅은 물론이고, 친해지고 싶다는 제안이 와도 미적지근하게 행동하며 상대방의 흥미를 잃게 했다.

성화에게는 10년간 꿈꾸고 갈망해 왔던 ‘아이돌’이라는 꿈을 지속시켜야 한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는 이 달콤한 성과를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데뷔 초에 맞닥뜨렸던 차가운 현실은 그에게 충분히 경고였다. 음악방송에서 노래가 일부 짤려서 무대를 수정하는 것을 걱정하는 것은 사치였다. 주 4일 기회가 주어지는 음악방송에 며칠 나갈 수 있을지 불안해하며 지낸 경험이 이 세계가 얼마나 험난한 것인지 체감하게 해줬다.

제 발로 다시 그런 길로 걸어가고 싶지 않았다. 성화는 자신의 선을 철저하게 지키며, 그 어떤 변동이나 실수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놈의 회식과 술이 문제였다.

이번 곡의 마지막 음악방송까지, 에이티즈는 1위를 하여 앵콜무대에 설 수 있었다. 음악방송 무대에 올라가니 마네를 했던 옛날과 달라진 성장.

멤버들과 스태프들은 이 성과를 기념하며 회식을 열었다. 이번 회식은 모두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1위를 달성이 회식 이유였지만, 회식과 일본투어 사이에 약 1주일간에 시간이 주어진다. 그 기간은 별다른 스케줄이 없는 재정비 기간으로 음악방송과 반복적인 일상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는 여유로운 시간이다. 모처럼의 휴식이라 회식에 참석한 모든 사람은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식사 자리를 즐겼다. 술잔이 계속해서 술을 채웠다 비웠다가 반복하며, 유쾌한 웃음과 대화가 오갔다.

성화는 평소처럼 분위기만 맞출 생각으로 술잔을 들었다. 그러나 그 절제된 선을 넘긴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허약한 주량에도 불구하고, 함께하는 팀 멤버들의 웃음과 기쁨에 동화되어 예상보다 훨씬 더 술을 마시고 말았다. 5년에 가까운 시간을 함께하며, 가까운 가족 같은 이들과의 자리는 그를 방심하게 만들었다.

“피시방 갈 사람!”

식당을 나온 종호가 신나게 소리쳤다. 회식은 1차만 끝났을 뿐인데 벌써 2, 3차가 마무리된 것 같은 흥겨움이다. 종호는 이 즐거움을 끊기지 않고 다음 장소로 피시방에 가자고 제안했다. 같이 갈 사람을 구하는 목소리에는 넘치는 에너지가 담겨 있었고, 동료들도 하나둘 손을 들며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나나나나, 호종이 나를 놓고 가지 마!”

정우영이 웃으며 종호를 따라붙었다. 체력과 주량이 모두 뛰어난 그와 몇몇 멤버들은 피시방으로 가기 위해 종호의 주변으로 모였다. 그들의 에너지는 하루 종일 타오를 기세였지만, 성화는 달랐다. 그는 이미 상당한 에너지를 소모한 상태였다. 술기운에 취해 몸이 무거워진 그는 피곤함을 느끼며,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갈게.”

성화는 나지막이 회식 이탈을 말했다. 체력적으로 더는 버틸 수 없었다. 알코올이 들어간 몸은 한계에 다다랐고, 의식은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우영은 이 자리에 성화가 남아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동그란 눈을 유지한 채 성화에게 물었다.

“성화형 안 갔구나? 혼자 갈 수 있지?”

“그러엄.”

성화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꼬리가 살짝 늘어지고,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것을 스스로 느껴졌다. 성화는 그제야 자신이 꽤 많이 마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성화만 깨달은 게 아니다. 과연 혼자 집까지 돌아갈 수 있을까? 5년을 함께해 온 멤버들은 저마다 의문을 품었다. 성화가 한계에 다다른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1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하는 성화의 취한 모습이다.

심지어 성화보다 체력이 약하거나 성화와 주량이 비슷한 멤버들은 1차 회식 중에 먼저 돌아간 상황이었다. 함께 있던 동료들은, 성화가 혼자 돌아갈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그러면서 계속 놀고 싶은 마음도 공존했다. 종호 곁에 있는 멤버들끼리 눈빛을 교환했다. 이 형을 그냥 데려가서 피시방에서 잠들게 할까? 아니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이디어 좀 생각해 봐. 성화를 놓고 갈 수도, 데려가기도 애매한 멤버들끼리 무언의 토론이 이어졌다.

“나도 들어갈게.”

논의 끝낸 건 정윤호의 한마디였다.

“야, 정윤호. 피시방 안 갈 거야?”

우영이 놀란 얼굴로 윤호를 쳐다봤다.

윤호는 잠시 멈칫했지만, 곧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 날도 있는 거지, 뭐.”

윤호의 말에 멤버들은 잠시 그를 말리려 했지만, 윤호가 안 들어간다면 성화를 책임질 대안이 없었다. 이내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윤호가 성화를 챙기겠다는 부담을 덜어준 것에 감사하며 보내주었다.

그렇게 성화와 윤호는 함께 회식 자리를 빠져나와 숙소로 향하게 되었다. 회식 장소는 숙소와 멀어 택시를 잡고 이동해야 했다. 택시가 접근하기 쉬운 장소로 위치하여 택시를 잡자며 성화는 택시가 모여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걸음이 불안정했지만, 곁에서 윤호가 그를 자연스럽게 부축해 주었다.

아무 말 없이 걸어가던 중, 성화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윤호야, 편의점 잠깐 들러도 돼?”

“뭐 필요해?”

윤호는 의아한 표정으로 성화를 바라보았다.

성화는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속이 좀 울렁거려서… 시원한 거 좀 마시려고.”

윤호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편의점 가자.”

윤호는 성화와 함께 있는 순간이 몇초라도 더 길어지는 방향이라면 언제든 오케이다. 저기 있네. 한블록 너머에 있는 편의점을 발견한 윤호는 성화에게 편의점 위치를 알려주었고, 성화는 윤호가 가리킨 그 편의점으로 몸을 입장시켰다.

편의점에 들어선 성화는 냉장고 앞에 서서 차가운 음료수를 바라보았다. 그는 속을 달래기 위해 시원한 음료 하나를 손에 들었다. 차가운 음료의 촉감이 손끝에 닿자, 성화는 한순간 술기운이 가시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그것은 착각이라는 걸 알 수 있듯, 바로 핑 도는 느낌을 받았다. 음료를 마시면 다소 낫겠지. 성화는 기대하며 음료를 꽉 쥐었다. 윤호는 성화가 음료수를 집는 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그 옆에 섰다.

“형, 많이 마신 것 같은데 괜찮아?”

윤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

“빨리 계산하자. 아니 내가 계산할게. 형은 잠시 나가서 앉아있어.”

성화가 들고 있던 음료수를 가로챈 윤호는 계산대로 향했고, 성화는 편의점 입구를 빠져나와 편의점 앞에 있는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멍하니 윤호는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취기에 시간을 보낸 성화는 윤호가 바로 왔다고 느꼈다.

윤호는 성화를 위해 음료의 뚜껑을 따서 성화에게 건넸다.

“형 괜찮아?”

성화는 음료수를 한 모금 마신 뒤 고개를 끄덕이며 윤호를 향해 대답한다.

 “응, 괜찮아. 그냥 조금 피곤해서. 이제 가자.”

윤호는 그런 성화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성화는 여전히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지만, 윤호는 그 모습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 성화가 스스로를 가두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 틈에 자신이 옆에 있고 싶었다.

윤호는 성화가 피곤한 몸으로도 스스로를 지키려는 모습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성화는 항상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하려 애썼다. 그것은 그가 선택한 길이었지만, 윤호는 성화가 조금 더 자신에게 마음을 열었으면 하는 바람을 품고 있었다. 지금이 나에게 찾아온 기회가 아닐까. 윤호에게 몇 년 만에 희망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형. 내가 여기로 택시 부를게. 천천히 쉬었다가 가자.”

“어? 고마워.”

성화의 상태가 안 좋으니, 윤호는 편의점 앞에서 택시를 탈 수 있도록 택시 어플로 택시 호출을 시작했다. 천천히 음료를 마시는 성화의 페이스라면 택시가 오는 시간대와 엇비슷하게 맞출 듯했다.

윤호가 앱으로 택시 호출을 마무리 짓는 것을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보던 성화는 갑자기 윤호에게 말을 꺼냈다.

"윤호야, 너 왜 피시방 안 갔어?"

성화의 목소리는 피곤함에 찌든 상태였지만, 그 안에는 약간의 호기심이 묻어 있었다. 술에 취한 상태였지만, 성화는 이 상황을 어색하게 느꼈다. 멤버들 중 피시방에 가지 않고 자신과 함께 돌아가겠다고 단독결정을 한 윤호의 행동이 의아했다.

윤호는 성화를 쳐다보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빛에는 무언가 숨겨진 감정이 담겨 있었다. 윤호는 마음을 표현하기로 했다.

"형 때문에…."

“어? 나를?”

성화는 잠시 그 말을 곱씹으며 윤호를 바라보았다. 윤호의 한 마디 속에 무언가를 감추려는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윤호의 한 마디 속에 윤호의 복잡한 감정이 숨어있었다.

데뷔 후 단둘이 있는 상황은 종종 있었다. 일본 투어 중 아부라소바를 같이 먹으러 갈 때 그들은 자연스럽게 함께였다. 팀 내 다른 멤버가 봤을 때도 성화와 윤호가 자주 어울리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오늘 밤, 문제는 둘 다 술을 꽤 마셔서 자제력이 평소보다 떨어졌다는 점이었다.

윤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 순간이 아니면, 언제 다시 성화에게 마음을 달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성화형."

“어?”

윤호는 성화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보다 더 진지함이 담겨 있었다.

"좋아해."

그 말이 나오자마자 성화는 다시 멈칫했다. 술기운에 몽롱하던 머릿속이 갑자기 맑아지는 기분. 잊고 있던 몇 년 전 순간이 떠올랐다. 그는 윤호의 얼굴을 바라보며 잠시 침묵했다. 되물어보지 않아도 어떤 의미인지 잘 알 수 있었다. 좋아한다는 게 같은 동료로서가 아님을 안다. 그전에도 그랬으니까. 나를 굳이 따라온다는 건 다른 의미일 테니까.

윤호는 긴장된 눈빛으로 성화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성화는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윤호야…"

성화는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쓰며 말을 이어갔다.

"너가 싫어서가 아니야. 왜냐하면…"

윤호는 잠시 말을 멈춘 성화를 바라보며 초조하게 기다렸다. 몇 년 전, 이미 거절당한 적이 있었기에 이번에도 비슷한 대답이 돌아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알고 있다.

성화는 깊은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연애하면 생각이 복잡해져서… 지금은 에이티즈에만 집중하고 싶어."

윤호는 성화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무슨 의미로 이유를 말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자유시간에 성화가 했던 행동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본 사람이 정윤호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저 단순히 거절당하는 것에 그치지 않기로 결심했다. 윤호는 다시 말을 꺼냈다.

"그러면,"

윤호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나를 가볍게 만나보는 건 어때?"

성화는 윤호의 제안에 순간 당황했다. 가볍게 만나보자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윤호의 표정은 진지했다. 성화는 한동안 윤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가볍게? 그게 무슨…"

“형. 택시 오면 3분만 기다리라고 해줘. 잠시만.”

윤호는 그 순간 무언가 결심한 듯, 갑자기 의자에서 일어나, 편의점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성화는 윤호의 돌발 행동에 놀라며 일어났다.

"어디 가?!"

성화가 외쳤지만, 윤호는 대답하지 않고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사라진 것에 어리둥절했지만, 택시가 오는지 확인해야 하는 책임감에 그를 따라가지는 못했다. 그저 편의점 유리 벽 너머로 윤호를 힐끔거리며 택시가 오는지 길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는 도대체 윤호가 왜 편의점에 들어갔는지 궁금했다. 성화의 시선은 자꾸만 편의점 유리 벽 너머의 윤호에게 향했다. 세면도구 코너 앞에서 고민하는 듯한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지만, 성화는 그가 무엇을 사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윤호가 돌아올 때까지 택시는 아직 오지 않았다. 윤호가 구매를 마치고 성화가 있는 테이블로 돌아왔다. 윤호가 손에 쥔 물건이 성화에 눈에 들어왔다. 작고 둥글게 포장된 무언가였다. 큰 윤호 손에 쥐어진 작은 네모난 박스, 제품을 보여주는 핵심 글씨 및 로고들은 전부 가려진 상태라 윤호가 무엇을 샀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성화는 그가 무엇을 사 왔는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고개를 갸웃하며 윤호를 바라보았다. 윤호가 성화 앞에서 손을 펴 보이자, 그제야 그 물건의 정체가 눈에 들어왔다. 콘돔이었다.

“어…?”

성화는 말문이 막혔다. 그 물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면서도, 윤호가 왜 이런 걸 사온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은 콘돔에서 윤호의 얼굴로 천천히 옮겨갔다. 윤호는 여전히 진지한 표정이었다. 장난스러운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그 순간, 성화의 가슴은 심하게 뛰기 시작했다.

"연애는 어렵지? 그럼 가볍게 만나보는 건 어때? 하루만, 아니 오늘 밤만."

윤호의 목소리는 망설임 없이 확신이 차 있었다. 성화는 윤호의 말을 듣고 당혹스러웠다. 당연히 거절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술기운에 흐려진 판단력 때문인지, 아니면 윤호의 진지한 눈빛 때문인지 성화는 그 제안에 쉽게 반응하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연애가 아니라면…’

성화는 마음속에서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윤호의 제안은 자신이 오랫동안 지켜왔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평소라면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술기운과 함께 윤호의 다정한 말투, 그 눈빛은 성화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그동안 단호하게 윤호의 고백을 거절했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도 모르게 망설이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윤호는 성화의 스타일이 맞다. 의도적으로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있기에 동료로 선을 그었던 것일 뿐. 싫냐 좋냐의 2지선다로 물어보면 좋아에 가까운 축이다. 외형뿐만이 아니라 성격적으로도 둘이 있을 때 편안함을 느끼기도 했다.

자신의 성적 취향을 알고 있음에도 너무 오랫동안 절제한 삶을 살아왔을 때 다가온 유혹은 성화를 흔들어놓기에 충분했다. 성화가 생각하는 고민거리를 윤호는 이해하고 있기에 연애가 아닌 잠깐의 만남으로 제안했다는 것조차도 성화에게 달콤했다.

윤호는 성화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눈치챘다. 성화가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 모습에 이번에는 다를 것이라는 확신이 피어났다. 그동안 성화는 윤호의 모든 접근을 단칼에 거절해 왔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성화는 말없이 윤호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 침묵은 성화가 고민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윤호는 성화가 조금씩 자신에게 마음을 열고 있다는 걸 느꼈다.

“형. 너무 부담 갖지 마. 내일부터는 다시 멤버로 지내면 돼. 무리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성화의 어깨를 만졌다. 그 손길은 따뜻하고, 성화의 마음을 조금씩 녹여갔다. 그 순간 성화의 머릿속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그가 오랫동안 스스로를 지키며 지켜온 자제력이, 그 한순간에 무너질 것 같았다.

윤호는 성화를 재촉하지 않았다. 마치 먹이를 기다리는 맹수처럼, 성화가 스스로 결정을 내리도록 조용히 기다렸다. 조급해하다가 성화가 멀리 물러나면 언제 또 기회가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 순간까지 몇 년의 시간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 침묵과 기다림은 성화에게 더 큰 압박으로 다가왔다.

괜찮을까? 성화는 자신에게 수없이 물었다. 그동안 오랫동안 절제하며 지켜왔던 삶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 순간, 윤호와 함께 있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을 완전히 흔들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왜 이렇게 쉽게 흔들리는지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성화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더 이상 그 갈등을 이어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오늘 밤만, 가볍게 .. 낯설겠지만. 한 번쯤은 괜찮을 것 같아."

윤호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멈칫했다. 성화가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곧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성화형. 나를 받아줘서."

그 후, 둘은 온 택시를 타고 조용히 집으로 돌아갔다.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 내내 별다른 대화가 없었지만, 둘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성화는 창밖을 바라보며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감정을 억누르려 애썼다.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가로등 불빛이 성화의 얼굴을 비추었다. 밝았다가 어두워졌다가 반복하는 서울 밤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왜 이렇게 쉽게 결정을 내렸는지, 왜 이렇게 흔들렸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평소라면 절대 이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텐데, 오늘은 모든 것이 다르게 느껴졌다. 술 때문일까? 아니면 윤호가 너무나도 확고하게 다가왔기 때문일까? ‘가볍게 한 번쯤은... 괜찮을지도 몰라.’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렸지만, 그는 그 유혹을 떨쳐내지 못했다. 술에 취한 탓인지, 피로가 극에 달한 탓인지, 그 순간만큼은 윤호와의 관계가 조금 달라져도 괜찮을 것 같았다.

윤호는 조용히 성화 옆자리에 앉아, 성화를 바라봤다. 성화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성화에게 아무런 말을 걸지 않았다. 그는 이 순간이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다가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숙소에 거의 다 왔어.”

“그래? 잠깐 졸았네.”

“형, 괜찮아?”

익숙한 풍경이 보일 때쯤, 윤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성화는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 괜찮아."

윤호는 성화의 말을 듣고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걱정하지 마. 오늘은 그냥 우리 둘이 편하게 보내면 돼. 내일은 내일의 일이니까."

그 말을 들은 성화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가 윤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윤호의 말은 언제나 그를 안심시켰다. 그 순간만큼은 그가 쌓아온 모든 불안과 갈등이 조금씩 사라지는 것 같았다. 성화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 순간, 윤호의 말대로 내일은 생각하지 않고 오늘만을 바라보자고 결심했다.

택시는 어둠 속을 뚫고 그들의 목적지로 향했다. 성화는 더 이상 생각을 꼬리 물지 않기로 결심했다. 오늘 밤만큼은 자신이 오랫동안 피했던 감정을 윤호에게 열어 보이기로 했다.

 

***

 

[ ♪♬♪♬♪♬ ]

익숙한 벨 소리에 성화는 눈을 떴다. 평소보다 더 몸은 너무 무겁고 피로감은 해소되지 못한 상태였다. 피곤하여 천천히 깨는 듯 눈을 살며시 뜨던 성화는 낯선 천장이 두 눈에 들어오자 바로 깼다. 그는 마치 잠에서 깨는 데조차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나 그가 마주한 천장은 낯설었다. 이곳은 그가 평소에 자는 숙소도, 호텔 방도 아니었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면서도 완전히 다른, 그런 공간이었다.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벨 소리가 계속해서 울렸다.

‘우영’이라는 이름이 떠 있는 화면을 보고 성화는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그 순간, 우영의 목소리가 성화의 귀에 쏟아져 들어왔다.

"형, 어디야? 지금 과외 시작 시간이야. 쌤도 왔어."

성화는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과... 과외?"

우영은 숨을 몰아쉬며 다그쳤다.

"형 설마 지금 깬 거?”

“어”

성화는 상황이 잘 정리가 되지 않았다. 어제 활동이 끝났다는 사실에만 집중했던 성화는 오늘 일정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어제의 회식, 그리고 오늘 오후 2시에 예정된 일본어 과외 시간. 성화는 전화를 받지 않은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눈을 비볐다. 머리가 띵했다.

우영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집에 없길래 먼저 나갔나 했거든? 그래서 연락 안 하고 난 따로 점심을 먹었는데 2시 과외 시간까지 형이 안 나타나니까... 혹시 돌아가는 길에 무슨 일 있었어?"

우영의 설명을 들으며 성화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낯선 듯한 이 공간은 어디일까? 그의 몸을 좌우로 돌리다 침대 옆에서 묵직한 무게감을 느꼈다. 침대 옆에 누군가 있었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바로 같은 팀 멤버인 윤호였다. 윤호는 이미 깨어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얕은 미소를 지으며 성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 없어.”

어제 상황 정리가 안 되었지만, 우영에게 설명할 수 없는 상황임을 본능적으로 느낀 성화는 괜찮다는 말로 일단 우영을 안심시킨다.

그러나 우영과의 통화가 이어지는 동안, 성화는 윤호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영에게 지금 윤호의 방에 있다는 걸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윤호도 그것을 알고 있는 듯, 말없이 성화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 눈빛에는 성화를 배려하는 듯한 조심스러움과, 어젯밤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무언가가 서려 있었다.

“어디 아픈 건 아니지? 해장은 안 하고 와?”

“속은 괜찮아. 곧 갈게. 미안. 먼저 수업해.”

성화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대답을 이어갔지만,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우영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한숨을 내쉬며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진다.

“알았어. 그런데 형, 진짜 괜찮은 거지?”

성화는 곧바로 대답했다.

“응, 문제없어. 금방 갈게.”

그는 급하게 전화를 끊고 한숨을 내쉬었다. 전화가 끊기자마자 주변이 더 선명해졌다. 그는 머리를 한 손으로 감싸며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윤호의 방이었다. 평소에 문 앞에서 보던 윤호의 방이었지만, 지금 침대에서 방을 보니 모든 것이 낯설게 다가왔다.

성화의 시선은 침대 옆 쓰레기통에 멈췄다. 그리고 그 순간, 어젯밤의 기억들이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윤호가 편의점에서 사 온 콘돔, 그 물건이 어젯밤 어떤 일을 했는지, 그리고 지금 쓰레기통에 처박혀 있다는 사실까지. 그 기억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며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어젯밤 그가 느꼈던 감정, 충동, 그리고 그 끝에 남겨진 혼란스러움까지. 모두가 그 물건들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듯했다. 성화는 회식에서 윤호와 단둘이 남은 순간을 떠올렸다. 윤호가 다가왔고, 자신은 그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지금 대낮까지 자버린 것.

성화는 침대에서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이불이 살짝 움직이는 소리조차 그에게는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몸 구석구석이 묵직하고, 어제의 고통스러운 흔적들이 다시 떠오르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몸의 여기저기에서 어젯밤의 여파로 인해 고통이 느껴졌다. 단순히 과음 때문이 아니었다. 성화는 자신과 윤호가 나눈 그 밤의 기억들이 몸 구석구석에 각인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 고통이 다시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윤호는 여전히 침대에 기대어 조용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윤호의 눈빛은 말없이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성화는 윤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나 윤호의 시선은 끊임없이 성화를 향하고 있었고, 그 안에는 어젯밤을 뜨겁게 만든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옆에서 윤호는 말없이 성화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다.

"괜찮아?"

윤호가 조용히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지만, 그 안에는 성화를 향한 걱정이 담겨 있었다.

성화는 잠시 대답을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

성화는 자기 옷을 주워 입으며 서둘러 이 공간을 벗어나고 싶었다. 어젯밤의 기억들이 그의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지만, 우선 해결해야 할 문제는 일본어 과외에 빨리 도착하는 것이었다. 성화는 옷을 챙겨 입으며 윤호에게 말했다.

"나... 사무실 가야 해. 늦었어"

그 말을 던지고, 성화는 재빨리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 순간 윤호가 조용히 질문을 던졌다.

"후회해?"

성화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윤호는 침대에 앉아 여전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기에 둘의 눈은 마주쳤다.

성화는 대답하지 못한 채, 문고리를 잡은 손을 꼭 쥐었다. 그 질문에는 단순한 호기심 이상으로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성화는 윤호의 시선을 마주하지 않으려 애써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 질문이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후회하냐'는 질문에 그는 자신도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답을 내리기에는 아직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그는 그 순간을 떠나고 싶었지만, 마음속에서 일렁이는 불편한 감정들이 정리를 하지 못하게 만든다.

"아니,"

“....”

성화는 짧게 대답했다. 그러나 그 답변 속에는 확신이 담겨 있지 않았다. 아직 그 질문의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냥... 내가 지금 너무 정신이 없어서. 나중에 얘기하자."

성화는 다시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윤호는 성화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형. 나중에 얘기하자."

성화는 조용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복도의 차가운 공기가 그를 감쌌다.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그는 머리가 조금씩 맑아지는 듯 했지만, 마음속의 혼란은 여전히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성화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고, 복도의 끝에 있는 계단으로 발을 향했다. 한 발, 한 발 계단을 밟을 때마다 그의 몸은 묵직하게 느껴졌고, 마치 계단을 오를수록 마음의 무게도 점점 더해지는 것 같았다.

계단 손잡이를 살며시 잡고, 한층 더 오를 때마다 지난 밤의 기억이 머릿속에 선명해졌다. 계단을 오르며 느껴지는 허리와 다리의 피로감은 윤호와 함께했던 그 밤의 흔적을 여실히 보여주는 듯했다. 숨이 조금씩 가빠지며, 그는 고개를 살짝 들어 계단의 끝을 바라보았다. 한 층이 지나갈 때마다 그가 쌓아올린 금욕의 벽이 점점 더 균열이 나는 듯했다.

그러나 마음속의 혼란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성화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어젯밤의 기억을 되새겼다. 윤호와 함께했던 그 순간은 자극적이었고, 그동안 절제해 왔던 성화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윤호와의 그 순간은 성화에게 너무나 강렬했다. 마치 계단을 오를 때 느껴지는 묵직함처럼, 그 감정과 기억들이 성화의 몸과 마음을 무겁게 했다. 발끝으로 계단을 밟을 때마다, 그의 생각은 윤호가 했던 말과 행동에 머물렀다. "하룻밤만"이라고 했지만, 성화는 그 말이 진심이 아니었음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도 그 하루로 끝낼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짧았던 밤의 기억은 차가운 복도 공기처럼 날카롭게 가슴을 찔러 성화를 흔들었다.

***

일주일간의 재정비 기간이 끝을 향해 다가왔다. 성화는 그동안 회식 이후로 스스로를 컨트롤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에 휩싸여 있었다. 곧 일본 투어가 시작될 것이었고, 멤버 8명 전원이 모여 투어 관련 공지를 받기 위해 회사 회의실에 모이기로 했다. 성화는 회사로 향하는 발걸음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멤버들과는 종종 마주쳤지만, 그날 이후로 윤호와 단둘이 있는 시간은 한 번도 없었다. 아니, 있었어도 성화는 의도적으로 피하려고 애를 썼다.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성화는 윤호와 마주치는 것이 두려워졌다. 그의 시선은 자연스레 아래로 향했고, 머릿속은 어제의 기억들이 어지럽게 맴돌았다. 문을 열고 회의실에 들어서자, 다른 멤버들이 이미 모여 있었다. 민기가 그를 보자마자 가볍게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성화 형, 과외 지각했다며?"

성화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요즘 들어 예전처럼 모든 걸 다 잡고 열정적으로 뛰어들지 못하는 자신이 미워졌다. 자신이 그토록 지키고 싶어 했던 자제력이 한순간에 무너졌고, 윤호와의 관계는 그로 인해 복잡해졌다.

산도 농담을 이어받으며 말했다.

"그날 진짜 술을 많이 마셨나 봐. 난 갔지만, 형은 1차 끝까지 남았었다며?"

“아, 피로가 많이 몰려서 그랬나 봐.”

성화는 종호, 산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다. 여기까진 피곤해서 그렇다고 넘길 수 있는 대화였다. 하지만 우영의 질문에 성화는 얼어붙었다.

“맞다, 형. 그날 어디서 잔 거야? 방에 갔더니 형이 안 보였잖아.”

질문에 성화는 숨이 막히는 듯했다. 성화의 머릿속은 다시 윤호와 함께했던 그 밤의 기억들이 떠오르며, 마음속에서 커다란 혼란이 일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엉켜버린 기분이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성화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지 못했다.

종호가 그 상황을 놓치지 않고 짓궂게 끼어들었다.

"우영이 형이 착하네. 나였으면 회의실에 오자마자 뺨 스매시 날렸을 텐데."

종호는 농담과 진심이 섞인 한마디로 성화를 한번 일깨워준다. 데뷔하고 약간의 시간이 지났을 때쯤, 멤버들끼리 약속한 것이 있었다. 아이돌 데뷔 후 초심을 잃는 행동이 보이면 정신을 차리게 뺨 한 대 쳐주자고. 초심의 행동은 싸가지가 없게 주변인을 대하거나, 나태해지는 것들이 후보군이었다.

종호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웃음을 자아내며 분위기를 풀려 했다. 그 순간, 모두가 한 번쯤은 웃음으로 넘길 만한 장난이었다. 하지만 성화의 표정은 어두워졌고, 분위기는 순간적으로 싸늘해졌다. 종호조차도 예상치 못한 반응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성화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다행히 그 순간 윤호가 말을 꺼냈다.

“성화형 나랑 돌아가서 술을 더 먹었어. 방에서 한 잔 더 하다가 언제 잤는지 기억도 안 나네.”

윤호는 별일 없었던 듯, 쿨하게 대답했다. 그 말에 다시 방 안의 긴장감은 사르르 풀렸다. 성화의 지각보다 윤호가 주량을 모를 수준으로 마셨다는 이야기에 멤버들은 더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윤호 형이 주량을 모를 정도로 마셨다고?"

우영이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다음엔 나랑도 한 판 붙어야겠어."

종호도 웃으면서 덧붙였다.

윤호는 여유롭게 그들의 도전을 받아주었지만, 성화는 여전히 그들 사이에서 어색하게 웃었다. 종호가 말한 ‘뺨 스매시’ 단어는 성화에게 단순한 농담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나태해진 모습을 지적당한 것처럼 느껴졌다.

회식 이후 성화는 자신이 이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지각이야 물리적인 사정으로 늦을 수도 있지만, 연습에 몰입이 안 되는 자신이 점점 더 걱정스럽다.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성화는 멍하니 윤호의 목소리에 집중하지 못했다. 머릿속은 여전히 어제의 밤과 그 후로 일주일간 계속 느껴온 무기력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날 밤 윤호와 함께 보낸 시간은 단순한 충동일까? 아니면 그에게 깊은 의미가 있었던 걸까? 성화는 그 질문에 스스로 답을 찾으려 애썼지만, 그럴수록 더 혼란스러워졌다. 무엇보다, 윤호와 함께 보낸 그 밤 이후로 자신이 나태해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하지 못할 느슨함이 그의 마음과 몸을 잠식하고 있었다.

내가 왜 이렇게 됐을까?

성화는 스스로 계속 물었다. 그동안 자신을 강하게 채찍질하며 지켜왔던 자제력과 열정은 좋은 성과를 가져왔고, 얻게 된 성과에 자부심을 느끼며 몇 년을 보냈다. 하지만 지금의 자신은 그때와 달랐다. 윤호와의 그 밤이 그에게 미친 영향은 생각보다 컸다. 성화는 그 기억을 억누르려 했지만, 자꾸만 그 순간들이 성화의 생활을 무너뜨렸다.

윤호는 조금 전 분위기를 성화 대신 풀어준 것도 성화에게 생각할 거리를 더 안겨주었다. 윤호는 말 그대로 "하룻밤만"을 제안했지만, 왜 지금 자신에게 온 질문을 대신 도와준 것일까. 성화는 자신도 모르게 윤호에 대한 감정을 더욱 깊이 떠올리고 있었다. 그동안 스스로를 얽매여 살아왔던 시간들이 윤호와 함께한 그 순간을 계기로 서서히 풀리고 있었다.

성화는 어딘가 모르게 자신도 윤호에게 얽혀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런 스스로가 답답하게 느껴졌지만, 윤호를 떠올릴 때마다 그의 존재는 더욱 크게 다가왔다. 결국 성화는 그 감정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으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 윤호를 향한 감정을 점점 더 자각하고 있었다.

윤호와의 그 밤은 제안처럼, 짧은 순간으로 끝날 수 없었다. 그날 밤 성화의 마음속에서 커다란 흔적으로 남아 성화를 옭아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