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섷
8 my heart
by. 해적
요즘 들어 박성화가 이상하다.
텅 빈 동아리실. 족히 여덟 명은 앉을 수 있는 책상 한가운데에 양손으로 턱을 괸 채 앉아 있는 채였다. 짙은 검은색의 단정한 머리카락, 넥타이까지 빈틈 없이 졸라 맨 김홍중은 벌점 명단에 단 한 번도 올라가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김홍중이 자습 시간을 빠진 후 동아리실에 몰래 들어온 것이다. 자기 자신도 이게 이렇게까지 고민할 일인가 싶을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박성화와는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제가 다른 친구들에게 성화랑 별로 안 친한데, 라고 하면 구라 치지 말라며 야유를 듣곤 했지만 자신은 늘 똑같이 대답했다. 박성화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제가 그렇게 말하면 부정 한 번 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자습 시간까지 빠져 가며 동아리실에 온 단 하나의 이유는 바로 박성화 때문이었다. 방금까지 안 친하다고 했으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김홍중은 지금 그 누구보다도 진지했다.
무더위가 가시려는 건지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오전부터 비가 내렸다. 제일 지루하던 수학 시간이 끝나고 오늘 점심 메뉴는 뭐냐며 떠들고 있으면 먼저 반응하던 사람은 당연히 박성화였다. 하지만 오늘따라 박성화는 조용했고, 다른 친구들이 책상 서랍 안 구겨진 식단표를 피고 나서야 식단을 알 수 있었다. 김홍중은 우중충한 창밖을 보고 있는 박성화에게 다가가 맞은편 의자에 앉아 빤히 시선을 맞춘다.
"배 안 고프냐."
"......"
"박성화? 뭐 보는데 대답도 안 하고...... 밖에 아무것도 없잖아. 야."
"나 오늘 점심 안 먹을래."
뭐? 누가 봐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김홍중이 입을 떡 벌리곤 박성화를 빤히 바라보았다.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그대로 벌떡 일어나 박성화의 얼굴을 두 손으로 쥔 채로 이리저리 살피기도 하고, 이마에 손을 올려 열을 확인해 보기도 했다. 아무리 아파도 죽을 세 그릇이나 먹던 앤데. 진짜 뭔 일 있는 거 아니야? 제가 헝클어버린 앞머리를 다시금 정돈해주고 나서야 손을 뗀다.
"어디 아파?"
"...... 아니. 그리고 너, 아니, 아니다."
다시금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탓에 여태 열려 있던 입을 꾹 다문다. 뭔 일 있는 거 맞는데. 박성화는 늘 그랬다. 무슨 일이 생겨도 말하지 않고 자기 혼자 끙끙 앓다가 체감상 오천 번은 닦달해야 겨우 말하는 편이었다. 그것도 끝에는 근데 괜찮아 걱정 안 해도 돼 따위의 전혀 믿기지도 않는 말이나 붙여가면서. 제가 제일 좋아하지 않는 것들 중 하나였다. 아무리 말해도 바뀌지 않는 그놈의 습관.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지금 제 손가락의 거스러미를 뜯는 것도 포함이었다. 손 좀 그냥 냅둬라, 좀. 한숨과 함께 가만히 있지 못하던 박성화 손을 툭 건들이면 바람 때문에 다시 헝클어져 버린 모습으로 김홍중을 바라봤다. 눈가에 물기가 서려 있는 것 같았다.
"그거 유난이야, 새끼야."
유난이라고? 내가? 점심을 거른 박성화가 걱정돼 매점에서 빵과 우유를 사던 참이었다. 저와 매점을 같이 간 세 명의 친구들이 모두 입을 모은 채 이해가 안 간다는 말이나 지껄였다. 야, 원래 밥을 고봉으로 쌓아 먹던 애가 안 먹으면 걱정 되지, 안 되냐? 하고 넘어가기도 잠시 김홍중은 제 얼굴이 일그러지지 않게 하기 위해 애썼다. 왜 박성화와 관련된 일이면 감정이 들쑥날쑥한 건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흘러 나왔다.
결과적으론 박성화가 제가 사다 준 빵도 먹지 않았다. 덤으로 야자도 하지 않고 집으로 가버렸고 오늘 하루 미간이 진정될 시간도 없던 김홍중은 책상에 고개를 처박은 채 입술을 뜯었다. 그 뒤 떠들던 애들을 포스트잇에 빽빽이 적던 것을 제 손안에서 구겨버리곤 가방을 대충 둘러메 동아리실로 향했다. 야, 너네 떠들어도 되는데 소리만 지르지 마. 그건 나도 어떻게 못 해 줘.
이게 동아리실에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이유였다. 진짜 유난인가. 하지만 김홍중은 자신이 이렇게까지 굴 수밖에 없는 이유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박성화와 처음 알게 된 이후로 딱 한 번, 저를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피해 다녔을 때가 있었다. 연락은 물론 아무리 얼굴을 들이밀어도 불편하다는 얼굴로 밀어내기만 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기분이 더러워서라도 관뒀을 텐데 김홍중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저를 봤을 때 말갛게 웃을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왜? 이유라도 알고 싶었다. 그게 어떤 이유라도 박성화가 강경하다면 그때는 납득할 거라고. 예전에 박성화가 똑같이 자신을 피해 집에 혼자 가려고 하던 날, 바로 뒤에서 이름을 불렀다. 물론, 그냥 갈 수도 있겠지만 그거까지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급해서.
"너 지금도 나 무시하고 가면 우리 이제 평생 모르는 사이로 지내는 거야. 그래도 괜찮아?"
"......"
"상관없으면 그냥 가. 그럼 나도 이제 신경 끌게."
한동안의 정적이 이어졌다. 학원 가야 하는데, 지금 가지 않으면 분명 혼날 텐데. 하지만 김홍중의 마음은 지금 학원의 학도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 제 앞에 있는 박성화가 울...... 울고 있네. 박성화는 조용히 몸을 돌려 쳐다보았다. 평소에는 볼 수 없는 일그러진 얼굴이라 제가 소리 쳐서 화가 났나 싶었는데, 아니었다. 매일 웃던 박성화가 저를 보며 울고 있었다. 야, 야, 박성화. 왜 울어, 어? 아니, 야, 니가 먼저 그래놓고...... 그러려고 그랬던 건 아니지만 제 말에 박성화는 더 크게 울었다. 진짜 미치겠네. 일단 가자. 김홍중은 우는 박성화를 데리고 다른 애들이 잘 지나다니지 않는 체육 창고로 향했다. 당번이 잘 잠그고 다니지 않는 탓에 문고리는 쉽게 돌아갔다. 그 안으로 박성화를 밀어 넣고 나서야 제대로 쳐다볼 수 있었다. 도대체 네가 왜 우는데. 지금 울 사람은 나 아니냐? 라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왠지 모르게 저 얼굴을 보니 그럴 수가 없어져서...... 작은 한숨과 함께 늘 지니고 다니던 작은 티슈를 건넸다. 물론 받지도 않아서 제가 벅벅 닦아줬지만. 어느 정도 진정이 된 듯 숨소리가 작아지자 그제서야 말을 꺼낼 수 있었다.
"그래서 왜 나 피했어? 이유라도 알려주면 내가 고칠 수 있잖아. 그런 게 아니면 그냥 말이라도 해 주고 피하던가. 갑자기 그러면 내가 뭐가 돼."
"미안해..."
"네가 그러면 나는 뭐, 박성화가 나 피하네, 어차피 내 알 바 아니니까 상관 없어. 이러겠냐?"
"아니......"
운 탓에 눈가가 벌게진 박성화는 제 말에 작은 목소리로 미안하다는 말만 덧붙였다. 난 지금 그걸 바라는 게 아닌데.
"그래서 이유는 안 알려 줘?"
박성화는 묵묵부답이었다. 진동이 울리는 핸드폰도 다 모른 척하고 너만 기다렸는데. 김홍중은 마른세수를 하고는 한껏 튀어나온 박성화의 입을 제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아오. 짜증 나, 진짜.
"앞으로 또 나 피할 거야, 안 피할 거야."
"안 피할게. ...... 진짜루."
"또 피하기만 해 봐. 그때는 무조건 한 대 때릴 테니까."
"응... 미안해."
순순히 저러는 거 보면 제가 뭔 잘못을 한 것 같진 않은데. 진짜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다시금 이어지는 정적에 김홍중이 먼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더니 가자는 듯 턱짓한다. 집 안 가?
"홍중아."
"왜, 집 안 가고 싶어서?"
사실 나도 그렇긴 해. 나 너 땜에 학원도 빠져서 오늘 집 가면 죽을 목숨......
"그거 받아줬어?"
"엉?"
뭘 말하는 거지. 얼굴을 푹 숙인 채 있는 박성화를 바라보며 눈만 깜빡인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대답이 재깍 튀어나오지 않자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을 내밀었다. 너 핸드폰 줘 봐. 부모님께 나 다쳐서 너가 도와줬다고 하게. 아니,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너 혼날 거 아니야. 이런 거라도 안 해 주면 나 내일 너 어떻게 봐. 얼른 줘. 그렇게 제 부모님께 전화까지 마친 후에야 헤어졌었다. 그날 저녁 박성화의 질문이 뭐였는지 그제서야 이해한 김홍중은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원래 친구가 그런 거 받으면 신경 쓰이고 그러나? 아, 뭐 자기 빼고 여친 생길까 봐 그럴 수도 있고...... 근데 그렇다기엔... 아니면 친구 뺏길까 봐? 박성화가 그런 타입이었나. 모르겠네. 계속해서 이어지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생각들이 가득했다.
다음 날 이 얘기를 다시 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타이밍 좋게 다른 친구가 제게 장난을 쳐 준 덕분에 은연중에 뱉을 수 있었다. 그냥 거절했어. 이상형도 아니고.
"미친 새끼. 개 이쁘던데, 눈 삔 거 아니냐? 니 이상형이 도대체 뭐길래 그런 애를 차냐고. 그 빼빼로 나한테 줬으면 바로 사귄다. 야, 번호 없냐?"
어, 안 줘. 계속해서 번호 한 번만 주면 잘해 보겠다는 말을 무시하며 슬쩍 박성화를 확인하는데 제 얘기를 들은 건지, 못 들은 건지 엎드려 있기만 했다. 지가 물어봐 놓고 궁금하지도 않나.
아무튼 나는 그때처럼 박성화가 나를 무시하고 지내는 걸 또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이렇게는 안 돼. 뭐 때문에 그러는 건지 꼭 알아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번에는 무시보다 밥 때문이긴 한데...... 박성화가 평소에 얼마나 먹는지 알면 내가 지금 하는 걱정들이 유난이라 생각할 사람은 없을 거라 확신했다. 급식은 세 번이나 다시 받아서 먹을 정도고 학교 끝나고 먹는 컵라면은 제가 한 입 먹을 동안 세 입으로 끝내기까지. 아직 말할 거야 한참 남았지만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이 길어지기 때문에 일단 그만 말해야겠다. 근데 문제는 그걸 어떻게 알아내냐는 것이었다. 아무리 캐물어 봐야 답 안 해 줄 건 뻔하고...... 그러다 스치는 한 생각.
따라가면 되는 거 아닌가?
점심 급식 한 번 굶는 것도 문제기야 하지만, 만약 끝나고 사 먹는 거라면?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덜 심각한 문제일 테니까.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이유 하나 때문에 김홍중의 미행이 시작되었다.
계획은 완벽했다. 박성화가 야자를 빠지는 날에는 나한테 말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이건 상관 없고, 빠지지 않는 날에는 저 또한 야자를 하고 뒤따라 가면 될 일이었다. 김홍중은 다음 날부터 계획을 실행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박성화는 점심을 먹지 않고 야자를 빠졌다. 그대로 몰래 빠져나와 뒤를 밟았다. 박성화 집이야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을 만큼 가봤고, 둔해서 제가 따라다녀도 눈치도 못 챌 게 분명했다. 원래 같았으면 아래 떡볶이 집에서 컵떡볶이도 먹고 걸어가면서 떡꼬치와 콜팝도 먹었을 텐데. 안타깝게도 박성화의 단골 가게인 떡볶이 가게는 지나쳤고 다음 코스는 편의점이었다. 학교 근처에서 가장 큰 편의점이기에 종류가 다양했다. 그 덕에 야자가 끝나고 배고프면 박성화와 컵라면 하나씩, 물론 박성화는 컵라면, 핫바, 삼각김밥 그리고 디저트까지 먹긴 했지만 지금 필요한 이야기는 아니고. 아무튼, 먹었었는데. ...... 여기도 실패. 얘 진짜 왜 이러지? 집에 가면 안 먹을 걸 아니까 그냥 둘 수가 없었다. 저러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박성화가 집에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한 후에야 집으로 발을 돌린 김홍중은 그날 침대에 앉아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다. 도대체 내가 뭘 할 수 있지. 아무리 음식을 들이밀어 봐야 소용 없고. 그냥 니네 집에서 산다 그래? 그냥 그래 봐? 지금 박성화는 혼자 지내는 중이었다. 혼자서는 못 먹겠다는 말을 종종 하던 탓에 박성화 집에 가서 밥도 같이 먹고 숙제도 하고 했었는데. ...... 그냥 같이 살까.
"야, 같이 살자."
"...... 뭐?"
김홍중의 폭탄 발언이 날아간 참이었다. 홍중아, 도서관에서 그런 말을 하면...... 안 그래도 조용한 공간이 더 적막해진 기분이었다. 갑자기 왜? 물어도 대답은 해 주지도 않고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너 혼자 지내잖아. 거절은 거절. 아, 나 선생님이 불러서 먼저 갈게. 이따 집 같이 가. 혼자 가면 죽는다, 진짜. 제 할 말만 하고 사라진 김홍중 덕에 덩그러니 남은 박성화만 얼떨떨했다. 앞으로 24시간을 붙어 있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속이 일렁였다.
같이 지내게 된 지 일주일. 단, 일주일 만에 박성화는 죽을 노릇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 옆에서 자고 있는 얼굴이 보이고, 씻고 나오면 요리도 못 하면서 아침을 차려둔 얼굴이 보이고, 학교에 가면 수업 시간에도 저를 힐끔 쳐다보는 얼굴이 보이고...... 하루종일 얼굴이 보였다. 김홍중 얼굴이. 장장 5년이었다. 내가 너를 좋아하게 된 날들이. 5년. 누군가를 좋아하는데 이만큼의 시간이 필요할까, 싶겠지만. 저는 그랬다. 이러한 긴 시간을 같이 보냈음에도 그 마음의 크기가 전혀 줄어들지 못하고 커져만 갔다. 절대 들켜서는 안 된다고, 너는 몰라야 할 것들이라고 몇천 번의 다짐 끝에 겨우 아무렇지 않은 척 굴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 모든 것들이 고역이었다.
"홍중아."
"응?"
이제 그만 오면 안 돼? 라고 말하기엔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너한테 이런 말을 어떻게 해. 계속해서 굶은 탓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속이 자꾸만 일렁일렁. 눈가가 시렸다. 누가 제 목을 막고 있는 것처럼 속에서부터 답답함이 올라왔다. 수만 가지 문장 중에서 고르고 골라도 내뱉을 수 있는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한참을 쪼그려 앉은 채 눈을 감았다. 할 수만 있다면 목 놓아 울고 싶었다. 김홍중에겐 잘못이 없다는 걸 알면서 너 때문이라고, 다 너 때문에 그런 거라고 저는 아무 잘못도 아닌 듯 굴면서 어떻게든... 김홍중이 손을 뻗어 박성화의 얼굴을 붙잡았다. 너 진짜 왜 그래. 무슨 일 있는 거 맞지? 영문도 모른 채 저를 걱정하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동안의 적막이 이어진 후에야 박성화가 작게 읊조렸다. 홍중아 나는......
니 사랑이 너무너무 먹고 싶어. 이해하질 못할 문장을 나열해 가며 박성화가 울었다. 저를 쳐다보던 얼굴이 금세 일그러진 채 축축해졌다. 그 얼굴이 무척이나 좋아서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것을 겨우 참고는 고개를 돌렸다. 박성화에게 들킬 자신이 없었다.
진짜 미치겠다, 성화야.
제 교복 소매를 길게 빼 박성화의 눈가를 문질렀다. 금세 축축해졌음에도 눈물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그만 울어. 너 먹은 것도 없잖아. 그러다 쓰러져. 박성화는 김홍중 볼 낯이 도저히 없었다. 내가 이러지만 않았어도 우리는 영원히 볼 수 있었을 텐데. 마음 그까짓 게 뭐라고. 지금 흘러가는 시간이 느리게 느껴졌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리의 끝은 절망적이겠구나 결론지었다. 너는 나 같은 사람이 아니니까. 김홍중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미안해. 그냥 제발 못 들은 걸로 해 줘. 아니, 그게 힘들면 그냥......"
횡설수설거리는 말들이 입에서 쏟아져 나왔지만 웃기게도 앞으로 안 봐도 된다는 말은 거짓말로도 나오지 않았다. 그 말만은 도저히 할 자신이 없었다.
"박성화. 내가 이렇게까지 하면서 뭔 얘기를 들었는지 알아?"
김홍중의 목소리가 들리자 자연스레 고개가 올라갔다. 저게 무슨 표정인지 해석하기가 어려웠다. 화가 났나? 아니면...
"유난 떨지 말라 그러더라. 유난이래. 내가 너한테 하는 모든 것들이. 난 살면서 유난, 이딴 단어를 너한테 대입해 본 적 한 번도 없었어. 당연한 거니까. 성화야, 이건 당연한 거잖아."
"그건, 그냥 네가 다정하니까."
"아니, 아니야. 내 마음은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야."
넌 내 사랑이 먹고 싶다고 했지. 나는, 너한테 무엇이든 먹이고 싶어. 내 사랑이든 뭐든 니가 행복하기만 하길 바라고. 나랑 같이 있으면 좋겠고. 날 피하면 진짜 돌아버릴 것 같아. 어떻게서든 널 붙잡고...... 붙잡아서... 김홍중의 입이 꾹 다물린다. 꽁꽁 감춰두었던 문장들을 내뱉자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이러다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을까, 하는 정신 나간 생각까지 했다.
"너 나 좋아해?"
이 문장 하나가 나오기까지 왜 이렇게 힘이 드는 건지. 이미 알고 있는 답이어도 직접 듣는 것과, 넘어가는 건 천지차이니까. 박성화의 입으로 들어야만 했다. 정말 날 좋아하는 건지. 날 사랑하는지.
"......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더 오랫동안 좋아했어. 아니, 좋아해. ... 지금도 여전히."
힘을 주고 있던 주먹이 스르르 풀린다.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제 손바닥이 붉어진 채 손톱자국이 나 있었다. 단정히 있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진짜 돌아버리겠다. 귀까지 붉어진 채 저를 바라보는 박성화를 끌어안았다. 누구나 그 얼굴을 보면 그럴 수밖에 없을 거라고. 자꾸만 웃음이 비죽비죽 새어 나왔다. 근데, 너 키 컸냐. 응, 조금? 그런 것 같더라. 좀만 숙여 봐, 쓰다듬게. 야, 너 꼬르륵 소리 난다. 그러게 내가 아침 차려줄 때 먹었어야지, 바보야. 그러게...
"박성화, 그래서 너 뭐 먹고 싶어? 말해 봐."
"나는 된장찌개 가브리살 버섯구이 밀면 닭갈비 볶음밥 물회곱도리탕샤브샤브양념게장간장게장소세지한입에먹어버리고소바불고기버거짜장면자메이카통다리스모크치킨떡볶이회초코파이먹고싶어."
뭔 랩퍼인 줄. 일단 세 개만 골라 봐. 다 먹기엔 너무 많지 않냐? 다 먹을 수 있어? 아무리 너라도 저거는 좀...... 우리 며칠 걸쳐서 좀 나눠가지고 먹자. 어? 앞으로 시간 많잖아. 박성화의 손을 잡은 이후로 정말 다행히도 식탐은 잘 돌아왔다. 너무 돌아와서 문제긴 하지만... 잘 먹으면 좋은 거지, 뭐.
"야, 성화야. 오늘은 뭐 먹을래?"
"나 니 사랑."
"왐마야..."
내가 유난인가. 저런 말에도 웃음이 나오는 건 널 너무 좋아하는 탓이겠지. 그래, 나도 니 사랑. 박성화가 말갛게 웃었다. 난 이거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