낫섷

潔粼의 人魚 (결린의 인어)

by. 슝슝

예로부터 인어는 신비하고 성스러운 존재이며, 남의 것을 탐내는 자를 홀려 벌을 주곤 했다는 얘기가 있다. 산이 살던 바닷가 마을에는 인어를 섬기는 사당이 있었고, 심심찮게 인어의 목격담이 들려오곤 했다. 당연히 마을 사람들은 인어의 존재를 믿었고 산 또한 인어의 존재에 의심을 품지 않았다.

워낙 파도가 센 바닷가로 악명이 높은 항구에서는 꼭 일 년에 한두 명씩은 사고가 났다. 사람들은 마을을 수호해주는 인어가 노한 거라며 제물을 바쳐 파도를 잠재우곤 했다. 신기하게도 사고가 난 사람들은 모두 말을 잃거나 기억을 잃었고, 그들의 악행이 밝혀지며 마을 사람들에게 쫓겨나듯 마을을 떠나곤 했다. 어쩌면 인어에 대한 소문들이 모두 진짜일지도 몰랐다. 산은 인어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졌다.

사람들의 인어 목격담에 공통적으로 나오던 안개가 자욱한 새벽, 동트기 직전의 바다에 산은 배를 띄웠다. 평소같으면 이렇게 날씨가 사나운 날에는 바다쪽으로 시선도 두지 않았겠지만 호기심을 못 이긴 산은 이내 안개 속으로 배와 함께 사라져버렸다. 짙은 안개 때문에 방향도, 위치도 알지 못한 채 얼마나 바다를 떠다녔을까. 산은 직감적으로 꽤나 먼 바다까지 나왔다는 걸 느꼈다. 조타석에 있는 방향계와 레이더가 제 역할을 못하고 엉망이었다. 바늘은 핑핑 돌아가고 레이더는 지직거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비까지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괜히 나왔나? 그렇지만 나도 인어를 만나고 싶은걸."

입을 삐죽 내밀고 우비를 챙겨 입은 산이 밖으로 나와 배 위를 한 바퀴 돌았다. 그럼 그렇지. 인어가 어디 있어. 포기하고 배를 돌리려던 순간, 바위 위로 검은 형체가 나타났다. 눈을 잔뜩 찡그리고 바라보니 사람인듯 했다. 바다 한 가운데에 사람이? 혹시 인어인가?

망원경을 꺼내들고 바위쪽을 향해 고개를 움직이던 산의 시야 가득 사람의 얼굴이 다가왔다. 산은 소스라치게 놀라 망원경을 떨어트렸다. 꽤나 멀어보였던 바위가 바로 산의 배 앞에 있었다. 산은 배를 세워두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새하얀 피부, 잿빛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를 가진 남자가 무표정으로 산을 빤히 쳐다봤다. 남자는 사람이 아니라 인어였다.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윤기나는 비늘이 남자의 다리(꼬리라고 부르는 게 더 적절할 것 같다)를 전부 덮고 있었다.

"인어다."

홀린 듯 인어에게 다가가던 산을 막아선 건 인어의 손가락이었다. 축축하게 느껴질 정도로 차가운 손가락이 미간에 닿자 산은 뒷걸음질 쳤다. 인어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표정으로 산을 혼내고 있었다. 마치 여기는 네가 오면 안되는 곳이라는 듯이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죄송해요. 하지만 제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어요. 제 무례함을 용서해 주세요."

인어는 다 이해한다는 듯이 산에게 물방울 모양의 파란 보석을 건넸다. 이걸 지니고 있으면 널 지켜줄 거라고,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가 산의 머릿속에 울려왔다. 인어는 꼬리를 들어 바닷물을 내려쳤다. 철썩 하고 물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산은 정신을 잃었다.

"으음."

"정신이 들어? 그러니까 이 날씨에 뭐 하겠다고 배를 띄워. 띄우기를."

산의 할머니였다. 꾸지람은 들었지만 그래도 살아 돌아와서 다행이라며 산을 꼭 안아주신 할머님은 죽을 가져오겠다며 방을 나가셨다. 인어를 만났던 게 꿈이었나 싶지만 산의 왼손에 쥐어진 보석이 꿈이 아니었음을 산에게 알려주었다. 인어가 진짜 있네. 산은 그렇게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소문과는 달리 산이 만났던 인어는 굉장한 미남이었고, 생각보다 친절했으며, 인간이 아니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맞닿은 온도가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창백하다 못해 백색에 가까운 피부는 도자기 같았고, 왜인지 산은 멀지 않은 미래에 인어와 다시 만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산이 인어를 만나고 며칠 뒤, 천둥번개가 치고 비가 많이 내리던 날이었다. 배를 띄우는 건 물론, 밖에도 나갈 수 없을 정도로 날이 험했던 그날, 산의 할머니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셨다. 평소 허리가 아파 걷는 것도 힘들어 하시던 할머니였다. 날씨가 이렇게 험한 날이면 어딜 나가셨을리가 없는데 집을 샅샅이 뒤져보아도 할머니의 흔적조차 보이질 않았다.

산은 우비를 입고 비를 헤치며 동네 이곳저곳 할머니를 찾아다녔지만 아무도 할머니를 본 사람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정말 혹시나 여기 계실까 싶어 갔던 바닷가 오두막에 할머니와 처음 보는 남자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안도의 한숨도 잠시, 산은 할머니에게 달려갔다.

"할머니! 대체 언제 나가신 거예요!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세요?"

"산이구나. 잠이 안 와서 잠깐 나왔는데 비가 쏟아지지 뭐니. 그래도 옆에 이 청년이 같이 있어줬어."

"멀리 잘 안 나오시는 분이 안 보이니까 저는, 혹시, 할머니... 무슨 일이라도 났을까봐... 흑..."

"아이고, 할머니가 괜한 짓을 해서 우리 강아지 걱정시켰구나. 미안하다."

할머니를 꼭 끌어안은 산이 눈물을 벅벅 닦고 할머니 옆에 자리했다. 비가 오는 걸 봐서 한 시간이면 그치겠거니 했다. 할머니 곁을 지키던 청년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산이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도 전에 남자는 오두막을 벗어났다. 산이 벌떡 일어나 남자를 불렀지만 남자는 사라져버린지 오래였다.

이내 비가 그치고 할머니를 부축해 집으로 향하던 산이 문득 뒤돌아 바닷가를 쳐다봤다. 언제 사납게 파도가 쳤었냐는 듯 바다는 잔잔했다. 못 보던 바위가 생긴 것 같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산은 할머니를 업어드리기 전에 주머니 속 보석을 손에 쥐고 바다를 향해 기도했다. 할머니를 구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아마 아까 그 청년은 전에 만났던 인어님이 확실한 것 같다고. 짧은 기도를 마친 산이 할머니를 등에 업었다. 할머니는 추운지 연신 기침을 하셨다.

그해 겨울, 산의 유일한 가족이었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이듬해 봄, 산의 옆집에 그때 그 인어를 닮은 성화가 이사를 온 건 어쩌면 우연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성화는 확실히 인어가 아닌 사람이었다. 인어보다는 혈색이 더 많이 돌았고, 잿빛 머리카락은 같았지만 눈동자의 색이 달랐다. 하지만 산은 성화가 그때 그 인어였을 거라고 믿었다. 성화의 목에 걸려있는 푸른 빛의 보석이 그 증거였다.

산은 이 마을에 유일하게 제 또래인 성화를 많이 믿고 따랐다. 겨우 두 살 터울인지라 그냥 친구처럼 지내기도 했고, 혼자가 된 산에게 가족처럼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기도 했다. 그렇게 둘은 점점 가까워졌다. 평화로운 일상으로 다시 돌아온 지 꼬박 일 년이 지나던 그날, 큰 지진과 함께 해일이 마을을 덮쳤다. 마을 뒤를 지키던 절벽만큼 커다란 파도 속에서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다치지 않았고, 다행히 몇몇 집이 침수된 것 외에는 딱히 큰 피해도 없었다.

다만, 산과 성화만이 그 마을에서 사라진 유일한 실종자였다. 집은 지진이 일어나기 전처럼 멀쩡했지만 언제 사람이 살았냐는 듯 냉기만이 가득했고, 그 둘을 다시 본 사람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