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낫섷
장미와 안개꽃
by. 떵밤
"산아...?"
산이가 왜 여기에 있을까.
그 물음의 답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아니, 성화가 산이를 본 순간 바로 알았다.
여기는 모텔 프런트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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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살, 공부 빼고 모든 게 재미있을 나이인 나는 친구의 권유로 소개팅을 하게 되었다. 예전부터 자만추를 선호하는 나는, 오로지 재밌어 보인다는 이유로 소개팅을 가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우리는 소개팅이라고 하기엔 민망한 소개팅을 하게 되었다. 미성년자의 소개팅은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밥을 먹고, 노래방을 가고, 쇼핑도 하였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다 보니 친구들은 어느 정도 마음이 맞는 친구를 찾은 것 같았다. 하지만 내성적인 나는 아직 친해진 친구조차 없었다. 그런 내가 신경 쓰였는지 산이는 나에게 말도 많이 걸어주고 이것저것 챙겨주었다.
산이는 소개팅에서 처음 만났다. 산이의 첫인상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산이는 내 이상형과 반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첫인상은 첫인상일 뿐이었다. 나는 배려 넘치는 산이의 행동에 점점 호감을 느끼게 되었다.
어느새 소개팅의 마지막 코스인 카페에 도착하였다. 여기저기서 묘한 기류가 오가는 것과 달리 나는 아직도 이 자리가 어색하기만 하다.
'괜히 온다고 했나... 나 때문에 애들이 불편해하는 거 아니야...?'
온갖 생각들이 떠오르는 중, 산이가 나에게 조용히 글이 써진 핸드폰을 보여주었다.
'나갈까?'
핸드폰에는 단 세글자뿐이었다. 산이 또한 조금은 불편하긴 했지만, 거절하는 게 어려워서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산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신호를 주듯 내 손을 살짝 잡고는 말하였다.
"나 먼저 간다."
나는 친구에게 나도 먼저 가겠다고 조용히 속삭인 후 카페를 나왔다. 카페 밖에서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산이가 보였다. 카페를 나오는 나를 보더니 환하게 웃으며 내 손을 잡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공원이라도 걸을까? 어때?"
산이의 물음에 나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공원에 앉아 한참 수다를 떨었다. 산이도 나처럼 소개팅을 선호하지 않지만, 친구를 따라왔다고 했다. 그러고는 이 말을 덧붙였다.
"연애 생각 없었는데, 너라면 괜찮을 거 같네."
산이의 말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가만히 있는 나를 보고는 산이는 나에게 말하였다.
"넌 어때?"
나는 당황한 눈빛으로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내 모습을 보고 산이는 내가 귀엽다는 듯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은 나 또한 웃음 짓게 만들었다. 한참을 웃던 산이가 나를 보며 물어보았다.
"사귈까?"
"좋아."
나는 좋다고 대답하였다. 그렇게 우리의 연애는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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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도 부럽지 않은 연애를 하였다. 학교가 다르지만, 같은 아파트에서 같은 버스를 타고내렸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아파트 앞에 있는 정류장에서 만나 같이 학교를 갔다. 준비를 빨리하는 내가 대부분 정류장에서 산이를 기다렸다. 정류장에 앉아 조금 기다리다 보면 저 멀리서 나를 보며 달려오는 산이가 보였다.
"많이 기다렸어?"
"아니야, 많이 안 기다렸어."
오자마자 나를 안아주면서 물어보는 게 우리의 일상이었다. 그러면 나는 항상 같은 답을 해왔다.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린 지 오래된 질문과 대답이지만, 우리는 그 속에서 다른 의미를 찾아갔다. 장미와 안개꽃을 함께 묶은 꽃다발처럼 우리만의 의미를 넣어 엮은 말들을 주고받는 오늘이 어제가 되는 것이 아쉬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영원이라는 것을 믿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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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우리는 함께하는 첫 새해를 맞이하였다. 20살의 새해를 함께하였다. 성인이 되고 맞는 첫 새해 카운트다운을 함께 외칠 수 있었다. 함께 술집으로 들어가 처음으로 술도 함께 마셔보았다. 첫 술은 쌉쌀했지만, 산이와 함께했기에 단맛이 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의 첫 새해가 추억으로 남았다.
시간이 지나 우리는 대학교 입학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같은 대학교에 입학하여 더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낼 수 있었다. 다른 학과였지만 같은 학교이기에 자주 만날 수 있었다. 대학교 생활이 안정되게 되면서 우리는 각자 알바를 시작했다. 나는 모텔 프런트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산이는 카페에서 알바를 시작했다. 알바가 끝나면 산이는 내가 일하는 곳으로 항상 와주었다.
"성화야!"
"고생했어. 안 바빴어?"
"오늘은 바쁘진 않았어. 그래도 힘들어..."
프런트에 앉아 1시간 정도 수다를 떨며 나의 퇴근 시간을 기다리는 게 우리의 일상이었다. 내가 퇴근하고 집에 가는 길에는 항상 타코야끼를 샀다. 타코야끼 사장님께서는 익숙하게 포장지 가득 담아주셨다. 집에 도착하면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산이는 책상을 피고 나는 앞접시와 수저 등을 준비한다. 항상 반복되는 일상에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1주년이 지나고부터 우리는 서로를 더욱 믿었다. 술자리도 전보다 많이 보내주게 되었고, 연락하는 횟수도, 만나는 횟수도 줄어들었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연락하지 않아도, 만나지 않아도, 표현하지 않아도 서로 사랑하고 있을 거라고. 모든 것이 변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변하지 않고 영원히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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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고 싶었던 영원은 존재하지 않았던 걸까? 영원하길 바랐던 그 시간들은 오래가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오지 않을 것 같던 순간이 찾아왔다. 산이에게 권태기가 찾아온 것처럼 우리는 점점 변해갔다. 평소 잘 웃어주던 산이지만, 더 이상 나를 보며 웃어주지 않았다. 피곤하다며 알바가 끝나고 찾아오지도 않았다. 나는 시간이 지나면 다시 그때의 산이가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아직 산이를 사랑하니까 기다리기로 했다. 항상 산이와 보내던 시간을 나 혼자 보내야 했다. 한동안 잊고 살았던 외로움이 산이의 빈자리를 채웠다.
산이를 기다리는 시간을 버티려면 나는 무엇이든 해야 했다. 평일 저녁에만 하던 알바를 주말 오후 타임도 들어가게 되었다. 바쁘게 일하다 보면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갈 것 같았다. 산이에게 연락이 올 때까지 나는 알바와 공부에 매진하며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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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평소와 같은 주말 오후. 나는 내가 일하는 모텔 프런트로 출근하였다. 손님이 많은 곳이기에 출근하자마자 바쁘게 일을 하였다. 한 시간이 넘도록 손님이 끊이지 않은 덕분에 쉴 틈이 없었다. 쉬는 시간 없이 손님이 오시지 않는 시간에는 어메니티 포장을 했다. 퇴근 시간이 다 되어갈 때쯤 어메니티 포장도 끝났다. 프런트를 정리하며 퇴근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손님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 출입문을 바라보니, 그곳에는 산이가 다른 사람과 서 있었다.
"산아..."
"아, 자기야 먼저 올라가 있어."
"..."
"너 오늘도 일해?"
산이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말하였다. 산이의 태도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왜 울어?"
"몰라서 물어?! 여길 왜 오는데! 누구랑 같이 오는 건데!"
나는 서운한 마음이 울컥 올라와 산이에게 소리쳤다. 그러자 산이는 여전히 단호하지만,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
"네가 알아서 뭐 하게?"
"우리 얘기 좀 해."
"난 할 얘기 없는데."
산이는 여전히 단호한 말투였다.
"이렇게 끝낼 거야? 사랑한다며!"
"내가? 너 같은걸?"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산이를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이별을 통해 남이 되었다. 어쩌면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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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와 나는 같은 학교인 탓에 산이의 소식이 자주 들려왔다. 같은 학교 학생이라는 산이를 다 알 정도로 산이는 정말 유명했다. 산이는 외모도 성적도 심지어 성격까지 좋기로 유명했다. 처음에 산이는 자신의 인기를 알지 못하는 듯 칭찬을 듣는 것이 어색해하였다. 하지만 산이가 차가워지기 시작했던 때쯤부터 산이의 성격이 변했다고 하였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관심을 즐기듯 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내게 들려오는 산이의 모습은 예전의 모습이 남아있지 않은 듯 보였다. 내가 사랑했던,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산이는 어디로 갔을까. 무엇이 산이를 지금의 산이로 만들었을까. 그저 나는 예전의 산이가 보고 싶을 뿐이다.
산이는 그 일 이후 내가 일하는 모텔에 자주 온다. 그것도 매번 다른 사람과 함께. 프런트 앞으로 와서는 너 같은 건 이제 필요 없다는 듯 나를 보며 웃고 간다. 학비 때문에 알바를 그만두지 못하고 그저 산이의 행동을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나 자신이 점점 비참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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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와 헤어진 지 반년이 지났다. 나는 이제 제법 잘 지낸다고 할 수 있었다. 가끔 산이가 생각이 나긴 하지만 추억으로 넘길 수 있게 되었다. 평소와 같이 나는 친구들과 강의를 듣고 학식을 먹고 알바를 하러 갔다. 항상 산이와 함께하던 일들을 친구들과 하는 것이 아직 어색하지만, 점차 익숙해져갔다.
몇 달이 더 지난 지금은 산이의 이야기를 친구들과 웃으며 얘기할 수 있을 정도로 산이와 작별을 하였다.
"성화야, 그 목걸이 어디서 샀어?"
"이거? 산이가 사준 거라 모르겠는데?"
"가져가려 했는데, 받은 거면 못 가져갔네..."
"이거 예쁘지? 산이가 목걸이는 예쁜 걸로 잘 고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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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강의 끝나고 잠깐 보자.'
산이와 헤어진 이후 처음으로 산이에게 연락이 왔다. 나는 산이에게 오래 고민하지 않고 답장을 보냈다.
'나 오늘 일 있어.'
잠시 후 산이에게 답장이 왔다.
'일이 그렇게 중요해?'
'너 나 좋아하잖아.'
산이의 답장을 읽고 나는 다시 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몇 시간 뒤 산이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왜 내 문자에 답 안 해?"
"바빴어."
"지금 나 좀 봐."
나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말하는 산이의 말에 나는 가라앉은 어조로 말하였다.
"내가 바쁘진 않나, 일이 있지는 않나 물어보는 게 우선 아니야?"
"넌 항상 내가 먼저였잖아. 일이 있어도 나올 거잖아."
"그건 예전이고. 지금은 많이 변했잖아. 나도, 너도."
'예전의 네가 그리워.'
차마 하지 못한 말을 삼키며 다시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
"넌 네가 어디서든 먹히는 거 알고 있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인 듯 산이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산아, 외롭게 살지 마. 티 내진 않지만, 많이 외롭지? 나 버리고 갔으면 행복하게 살아야지."
산이는 조용히 내 말을 듣고 있었다. 내 말이 끝나자, 산이가 전화를 끊었다. 잠시 예전의 산이가 돌아온 것 같았다. 이 느낌이 착각이 아니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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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에게 전화가 온 날 이후 산이는 휴학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캠퍼스 내에서 한 번을 마주치지 못하였다. 시험 기간인 탓에 나는 알바도 그만두고 바쁘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바쁜 나날로 인해 산이를 잠시 잊고 살았다. 시험이 끝나고 집으로 가고 있었다. 시험이 끝나서인지 산이가 문득 생각났다. 매일 가는 길이지만 유독 그날따라 산이가 보고 싶었다. 항상 산이와 함께 걷던 이 길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져 땅에 시선을 고정하고 집까지 걸어갔다. 집에 다 와 고개를 들어보니 그곳에는 산이가 서 있었다. 그날은 우리가 헤어진 날처럼 추운 겨울이었다. 언제부터 서 있었던 건지 얼굴이 빨갛게 얼어있던 산이가 나를 보자 어딘가 모르게 쓴웃음을 지으며 내 이름을 불렀다.
"성화야."
"여긴 어쩐 일이야?"
"미안해."
"어?"
"너는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었는데, 나를 행복하게 해줬는데, 나는 너에게 상처만 주었네. 미안해."
갑작스러운 산이의 사과에 나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하였다. 그런 나를 보고 산이는 말을 이어갔다.
"용서해달라는 거 아니야.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자는 것도 아니고. 그냥... 사과는 꼭 하고 싶었어."
"고마워. 사과해 줘서."
"그리고 염치없지만... 보고싶었어 성화야. 너는 어땠어?"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산이에 나는 솔직하게 대답해 주었다.
"나는 예전의 우리가 보고 싶어."
"늦은 시간에 미안해. 피곤할 텐데 들어가서 쉬어. 난 갈게."
점점 멀어지는 산이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놓치면 안 될 거 같다는 느낌이 왔지만, 산이를 더 힘들게 하는 것 같아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때 산이를 잡았어야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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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나는 일상으로 돌아갔다. 산이와 함께했던 순간들을 마무리 짓고 행복한 기억으로 추억으로 남기고 살아가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나에게 편지가 한 통 도착했다. 그 편지는 산이에게서 온 것이었다. 편지를 읽던 나는 그때 산이를 잡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되어 눈물만 흘렸다.
'성화야, 이 편지를 읽을 때쯤이면 나는 너의 곁에 없겠지? 너희 집 앞에서 얘기하던 그날 있잖아. 아무 말 없이 찾아가서 미안해. 얼마 전 마지막으로 통화하던 날, 그날부터 많이 후회했어. 네가 항상 내 옆에 있어서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어. 모두가 너처럼 나를 대해주는 게 당연한 거라고 믿었어. 네 말을 듣고 알겠더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이 세상을 혼자 살아가고 있었다는 걸. 너무 보고 싶다, 성화야. 평생 너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살아가 보려 했는데,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못 견디겠어. 미안해. 이렇게 도망쳐서. 우리 다음 생에는 만나지 말자. 내가 너무 힘들게만 했잖아. 나 말고 너를 더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과 만나. 정말 미안하고 사랑해. 잘 지내.'
붉은 장미와 안개꽃을 묶은 꽃다발을 만들었던 우리. 산이는 나에게 장미꽃만을 남겨주고 안개꽃을 가져갔다. 이제는 내게 남긴 장미를 산이에게 나눠주려고 한다. 우리 그곳에서 예전 일은 다 잊고 행복하자. 사랑해 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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